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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go Jun 25. 2022

충무로, 내 인생 첫 고시원

#1, 나의 이야기 

1999년 3월, 서울을 향해 기차에 몸을 싣고 무작정 떠나왔다. 


내 통장도 아닌 주머니에 든 달랑 50만 원을 가지고 묵직한 여행가방 하나를 챙겨서 올라오게 된 것이다. 말 그대로 일종의 야반도주, 부모님에게 떠난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멀쩡히 다니던 대학교에 휴학계를 내고서 서울로 향하게 된 그날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학과 홈페이지를 만들고서 받은 50만 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적지 않았던 돈을 가지고 가슴에 불씨 하나만 가지고서 상경해버린 것이었다. 물가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평생 반찬가게에서 식료품 가게에서 콩나물 하나 사 보지도 못했던 형편없이 곱게 자란 놈이 무작정 올라와 버린 것이다. 


첫날은 지인의 지인, 그러니까 시각 장애인이자 지압사로 일하시는 분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그리고 고시원을 구할 때까지만 편하게 있어도 된다는 말씀을 들었고 나는 서울 지리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고시원을 알아보기 시작했었다. 


"고시원은 또 다른 세상"


내게 고시원은 그랬다. 상상을 초월하는 작은 크기의 방 하나, 이걸 방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아도 매우 작았다. 처음 간 곳은 기억에 영등포 어귀의 한 고시원이었다. 다른 기억은 잘 나질 않는데 단 하나의 기억 그러니까 충격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벽과 벽 사이, 방과 방 사이라고 하는 게 맞지 싶다. 완벽히 막혀 있지 않았다. 게다가 옆 방의 인기척은 세세하게 내 귀에 들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두드려 보았는데 가벽이었다. 합판도 아닌 널빤지 같은 가벽, 이런 벽 하나를 방으로 구획을 나누어 놓았으며 방이라고 부르며 살 수 있는 공간이라고 내게 너스레를 떨었던 고시원 관계자... 아연실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로 처음 올라온 내가 발을 디딘 곳은 다름 아닌 충무로였다. 내가 영등포를 염두에 둔 것은 계약직으로 방송국에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가장 가까워서였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리고 내가 얼마를 받게 될지도 몰랐으며 그저 학생으로 지내오면서 본가에서 학교를 다니던 순진한 청년일 뿐이었다. 그렇게 살던 촌놈이 갑작스레 세상의 현실과 조우하게 된 셈이었다.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내 수중의 돈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50만 원은 돈이 아니었다. 그저 종이 쪼가리에 불과해 보였다. 


영등포에서 한 차례 충격을 먹은 나는 충무로로 돌아와 배가 고파서 짜장면 한 그릇을 먹으려고 근처를 배회했다. 희미한 기억에 내가 찾은 곳은 '남경'이라는 중국집이었다. 짜장면은 꽤 맛있었다. 맛있다기보다는 평범한 짜장면의 맛이었지만 워낙 허기가 진 탓에 나는 맛있게 먹었고 식후땡으로 담배 하나 물고서 둘러보던 중에 바로 20미터 옆의 고시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갈 곳은 고시원뿐이었으니 돌아보자며 마음을 먹었고 곧장 고시원의 실장에게 말을 걸었다. 


"50만 원 밖에 없었던 이유"


내 수중에 단 돈 50만 원 밖에 없었던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어머니가 연대보증을 잘못 쓰셨고 그 여파로 내 아버지는 어머니의 빚을 모두 갚아 주었다. 그러나 결국 두 분은 내가 이혼을 권유했다. 서로가 성격이 강하고 자존심이 센 분들이라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어떤 이유로 보증을 서게 되었는지를 말하지 않았으며, 명예를 중시했던 내 아버지는 절차상으로 이혼을 하면 책임을 질 필요가 없음에도 바보처럼 모든 재산을 털어서 당시로서는 컸던 금액을 갚아 나갔다. 그 와중에 아버지는 동생의 말에 따르면 힘에 부쳐서 화장실에서 두 번이나 쓰러졌다고 한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금전적인 사태가 발생해서 돈이 많았던 우리 집은 돈이 없는 집으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장남인 나는 아버지에게서 손을 벌릴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머릿속에 든 생각은 두 가지였다. 집안에 부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동시에 내 적성과 맞지 않은 전공자로서 연구실을 들어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인생의 개척이 여느 때 보다 절실했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방송국의 편집요원으로 일을 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서울로 올라온 셈인데 정작 거처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짜장면을 먹고 난 이후 바라본 동국대 후문 충무로 고시원을 절실한 마음으로 두드렸다. 


"실장님, 방 좀 보러 왔습니다"


동국대 후문에 위치했다는 사실도 지내면서 알게 된 것이다. 전혀 서울 지리를 몰랐고 충무로가 영화의 메카라는 정도의 신문기사만을 접했던 나로서는 위치감각이나 서울에 대한 현실적인 정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고시원 방 하나를 둘러보겠다는 내 말에 실장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고 남자들이 거주하는 고시원 방 중에 하나를 내게 보여주었다. 창문도 없고 침대와 책상이 연결된 기하학적인 디자인, 옷걸이 두 개가 벽에 박혀있는 방이 아닌 그런 협소한 공간이었다. 누우면 머리가 닿을 것 같았고 누워서 두 팔을 벌리면 양쪽의 벽이 내 손에 닿을 것만 같은 크기였다. 


영등포 고시원을 경험한 나는 제법 아는 척이라도 할 요량으로 벽을 두드려 보았다. 역시 가벽이었다. 그러나 이번 고시원은 영등포에 비해서 두터웠다. 그것만으로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나를 발견했고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격을 물어보니 35만 원이었다. 엄청난 충격이 밀려왔다. 이런 쪽방 하나에 35만 원을 내야 한다는 게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더 알아볼 힘도 없었고 망연자실한 채 다른 방도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방 몇 개를 둘러보았는데 창문이 있는 방은 다른 사람이 있어서 현재는 들어가기 어렵다고 했고 시간이 지나면 창문이 있는 방으로 옮겨 줄 수 있다고 했다. 출근을 해야 하는 날짜는 이틀 후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창문도 없는 방을 계약하고 말았다. 


옥상을 둘러보고 있으니 그래도 남산 근처라 그런지 서울 시내가 조금은 눈에 들어왔다. 나름 뷰가 나쁘지 않았다. 세탁기와 건조대가 걸려있었고 흡연구역이었다. 나는 담배 하나를 꺼내어 물었다. 쓸쓸함과 씁쓸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당시에 기억을 다시 되짚어 보아도 어떤 감정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옥상에 올라오면 밤에는 약간의 낭만이 느껴지겠구나 하는 그 정도의 위안이 있었을 뿐이다. 


방으로 내려와 여행용 가방을 열었다. 옷을 넣을 수 있는 서랍장도 없었고 책상 아래 공간에 여행용 가방을 쳐 박아 놓았다. 그래야만 내가 누울 수 있었다. 다른 누군가를 초대한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말이 되지 않는 그런 공간이었다. 소독이 된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일단 침대에 누웠다. 베개도 없었다. 불을 끄고 누우면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천장을 응시하다가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심신이 지쳐있었다. 하지만 내 가슴속에는 방송국에서 일을 한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벅차올랐다. 


몇 시간을 잤을까... 시계를 보니까 저녁이었다. 


"생존본능을 위한 감각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 보았다. 고시원 근처를 하이에나 같은 심정으로 배회하기 시작했다. 식당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식당이 있는지, 어느 장소가 지하철과 가까운지를 염두에 두고 무작정 걸었다. 자그마한 분식집에서 내 발걸음은 멈추었다. 돈가스가 먹고 싶었다. 돈까스는 내가 사랑하는 음식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건네어진 돈가스는 냉동 돈까스였고 장사가 되질 않아서 오랜 시간 냉동고에 있었는지 특유의 냉장고 냄새가 베어있었다. 하지만 배가 고팠다. 허겁지겁은 아니지만 끝까지 먹었으나 결국 배탈이 났다. 


편의점으로 가서 음료수 하나를 샀으며 담배 하나를 꺼내어 물었다. 편의점이 제공하는 의자에 앉아서 지나가는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쁘게 걷는 사람들, 저들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하는 생각이 금세 스쳤다. 나와 같은 고시원일까 아니면 제법 방처럼 갖추어진 공간일까. 사람이 힘들면 자신이 처한 입장에서만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말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 


고시원으로 올라와 무작정 옥상 위로 올라갔고 담배를 쉴 새 없이 태웠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감각한 내 상태를 더 자세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냥 내 마음은 연신 어두웠고 만원 짜리 하나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 서울이라는 곳의 물가는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서른이 채 되지 않는 20대가 느낀 그날의 고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한 고시원에서 3년을 넘게 살았다. 내 기억에 고시원 생활을 끝낸 것이 3년 하고도 6개월 정도인 것 같다. 워낙 오래된 일이다 보니 정확한 기억이 아닐 수 있지만 꼬박 3년을 채우고 마지막으로 충무로 대한극장 건너편의 최고층에 위치한 고시원을 마지막으로 나는 내 인생에서 고시원 생활을 청산했다. 



"고시원에서 내가 얻은 것은..."


3년 간의 고시원 생활로 내가 얻고 깨달은 것은 별 것이 없다. 고시원이 정작 고시생을 위한 공간이 아닐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과 창문 하나 터진 방 하나에 프리미엄이 발생한다는 말도 안 되는 사실과 창문이 있음으로써 겨울에 그 쪽방 하나가 얼마나 추워질 수 있는지, 창문 옆에 약간의 공간이 더 있으면 샴푸나 각종 물품을 올려놓을 수 있는 환상적인 공간이 된다는 어이없음, 그리고 고향에서 보낸 반찬들을 냉장고에 넣어 두면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그걸 몰래 처먹는 인간들이 있다는 수준 이하의 세계, 이런 어처구니없음을 온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나는 생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공황장애를 겪었으며 불안장애와 수면장애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철없는 20대였고 방송국에서 일을 한다는 사실과 집안에 부담을 주지 않는 장남이 되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미친 듯이 일을 하면서 버티었다. 


결국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내가 고시원에서 얻은 것은 '고통 아닌 고통'이었던 셈이다. 이때의 고시원의 기억 때문에 내가 땅콩집(협소 주택)의 소중함과 실내 인테리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작은 공간의 문제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삶에 경험이 왜 중요한가라고 누군가 질문을 한다면 중요하다고 답은 할 수 있겠지만 고시원의 기억은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이었다. 


나중에 다시 나는 사업의 실패로, 둘이었다가 혼자가 되어 원룸으로 옮기게 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스쳐 지나가는 분들의 공감과 댓글은 저에게 커다란 힘이 됩니다. 미천한 글일지라도 여러분의 공감은 저의 짧지 않은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 그리고 이렇게 끝까지 읽어 주심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하루도 즐거운 하루가 되시기를 바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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