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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휘 Aug 03. 2020

순례길에서의 교통수단

과연 100% 다리로만 걸었을까? ㅎㅎ 아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 보면 1순위로 그리워지는 게 하나 있다. 바로 ‘바퀴’다. 두 다리로만 걷다가 어쩌다 차를 탈 때가 있을 것이다. 구간을 스킵하기 위해 버스나 기차를 탈 때도 있고, 다쳐서 택시를 탈 때도 있다.


두 번째 순례길을 떠났을 때 다짐한 게 하나 있다. '이번엔 택시를 3회 미만으로 타자.' 순례길에서의 택시라니, 코웃음을 칠 수도 있다.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걷다 보면 수많은 유혹이 있다. 물론 유혹을 이겨내고 800km를 두 다리로만 걷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이겨내지 못했고, 사실 이겨낼 생각도 없었다. 몇 km 쯤이야.. 바퀴의 힘을.. 빌려도 되지 않을까? 순례길에서 택시 타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잖아, 하면서.


Puente la Reina 가는 길, 첫 차를 타다.

이번 순례길에서 처음으로 바퀴의 힘을 빌린 날이다. 아마 4일 차일 것이다. 팜플로나에서 푸엔테라레이나 가는 길이었다. 너무 힘들어서도 아닌, 의지가 약해서도 아닌, 길을 잃어서 차를 탔다. 분명 노란 화살표를 잘 따라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화살표가 안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포장도로도 뚝 끊겼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두 다리를 멈출 순 없었다. 길치의 특징이다. 아닌 것 같은데 계속 직진하게 된다.


그때, 내 뒤에서 차가 따라와 '빵!' 하고 울렸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스페인 할아버지가 나를 보고 웃는다. "너 길 잘못 가고 있어!"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이미 2km나 이탈해 있었다. 아찔했다. 안 그래도 오후 1시가 넘어가는 시각이라 엄청 더웠는데. 무려 2km나 이상한 곳으로 왔다니.


할아버지는 길까지 태워주겠다며 승차를 권유했다. 순례자의 자존심? 위엄? 그딴 거 없었다. 냉큼 탔다. 오래된 차였는지, 차가 엄청 덜덜거렸다. 그래도 편안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기술인지... 할아버지 정말 감사합니다.


레모네이드 한 잔

이 차를 타고 오늘의 목적지까지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던 것도 잠시. 할아버지는 정말 정직하게 내가 이탈했던 2km만 달려서 날 내려주었다. 차에서 내리고 싶지 않았다. 진짜로. 하지만 내려야 했다. (ㅋㅋㅋㅋ)


이후로 Puente la Reina까지 가는 길은 정말 더웠다. 팜플로나에서 새벽 일찍 출발하면 뭐하나. 중간 마을에서 두 시간을 쉬고, 길도 잃고 하다 보니 금방 오후가 되었다. 결국 오후 3시쯤 돼서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할아버지가 태워다 주시지 않았다면 더 늦었겠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벨로라도 갈 때 한 번 더.

이왕 차 얘기를 했으니 순례길에서 택시 탄 썰들을 마구 풀어버릴 테다. 사실 위에 말했던 Puente la Reina 가는 길에 탔던 차는 택시는 아니다. 그저 잘못 간 길을 2km 되돌려주셨을 뿐. 하지만 Belorado로 가는 길에는 정말 택시를 불러 탔다.


그 날은 텐션도, 체력도 좋은 날이었다. 마음이 즐거웠고, 발걸음도 가벼웠다. 하지만 목적지까지 10km 남짓 남았을 때부터 엄지발가락이 아프기 시작했다. 무시하고 걸었다. 5km를 남기고 중간 마을 벤치에 앉아서 양말을 벗었다. 발가락이 아팠던 이유를 찾았다. 정말 거대하고 끔찍한 물집이 생겼다. 그것도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에..


걸으면 계속 마찰이 생기는 부위였다. 물집을 보자마자 기가 막혔다. 태어나서 이런 물집은 처음 봤다. 급격히 기분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땅을 딛고 서있는 것조차 아플 정도로 물집이.. 끔찍했다. 결국 결심했다. 나머지 5km는 택시를 타기로. 오늘 15km 걸었으니까 마지막 5km는 스피드로 조져보자. 뭐 어때.


웃기게도, 순례길 중간중간에는 콜택시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다들 걸으러 온 사람들인데 택시가 많다. 부르면 온다. 값도 싸다. 1km에 대략 1유로. 5km면 5유로다. 몇 명이서 같이 타면 더더욱 저렴하다. 순례길 택시값 좀 올려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안 타지..ㅎ


5km를 3분 만에 도착했다. 엄청난 스피드에 놀랐다. 그때 체력으로 걸어갔으면 2시간은 걸렸을 텐데, 3분 만에 도착하니 감회가 남달랐다. 사실 기분이 복잡했다. 남들은 물집이 나도, 다리가 아파도 꿋꿋이 걷는데 젊은 내가 이래도 되는 걸까 싶었다. 치트키를 사용한 기분이었다. 한 마디로, 찝찝했다. 그리고선 다짐했다. 이제 정말 힘들어도 택시는 타지 말자!


대신 버스를 탔다;ㅋㅋ;;ㅋ;;

힘들어도 택시는 타지 말자! 대신 버스를 타자!..... 그렇다. 다음 날 버스를 탔다. 벨로라도에서 부르고스로 가는 50km를 패스했다.


잠깐 변명을 해보자면, 일단 비가 많이 왔다. 그리고 생장부터 같이 걸어온 정들었던 사람들과 같이 놀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들은 부르고스에서 레온으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재정비 시간을 가질 겸 부르고스에서 아파트를 빌려 2박을 하자! 는 다짐과 함께, 버스를 끊었다.


그래.. 또 남들이 보면 코웃음 칠 수도 있겠다. 솔직히 말하면, 살짝 부끄럽기도 하다. 이게 무슨 순례자야? 싶기도 할 거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난 후회하지 않는다. 순례에도 다양한 형태가 있다. 난 그중 추억과 유도리를 택한 것뿐..^^.. 덕분에 아파트를 빌려 2박 동안 요리도 해 먹고, 아이스크림도 마음껏 사 먹고.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사리아로 가는 택시..

놀랍게도, 부르고스 이후에는 사리아까지 택시를 안 탔다. 다 두 다리로 걸었다. 중간중간 택시의 유혹이 천 번쯤 있었지만, 다 뿌리쳤다. '나는 순례자다'를 마음속으로 끝없이 외치며.


하지만 사리아로 가는 날, 큰 사건이 벌어진다. 나중에 따로 글로 쓸 테지만, 자전거 사고가 났다. O Cebreiro에서 사리아로 내려가는 길에 자전거를 빌려 탔는데, 내리막길에서 제대로 낙차 사고가 난 것이다. 손, 허리, 무릎을 다쳤다. 도저히 그 상태로는 자전거를 계속 타거나, 걸을 수 없었다. 중간에 자전거를 반납하고, 사리아로 가는 택시를 탔다. 진짜루.. 너무 슬펐다.


700km를 왔는데, 100km만 남겨두고 크게 다쳤다는 게 속상했다. 다친 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산티아고까지 걸을 수 있을까도 걱정됐다. 결과적으로는, 100km 중 40km 정도는 택시를 탔다. 매일 순례자 병원에 가서 상처 드레싱을 해야 했고, 상처가 너무 아팠기 때문에 하루 20km를 넘게 걷는 건 힘들었다. 이번 순레길이 아쉬운 이유다. 막판에 택시를 너무 많이 탔다. 다쳐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아쉬웠다.


동양인이 손에 깁스를 하고, 다리에 붕대를 감고 걷고 있으니까 시선을 많이 끌기도 했다.


"어디서 왔어?"

"나 한국에서 왔어."

"오..! 근데 그.. 몸은 왜 그래? 다쳤어?"

"아, 며칠 전에 자전거에서 넘어졌어."

"세상에. 어디서 출발했어?"

"생장."

"오마이갓. 다들 박수!!!"


이런 대화를 10번쯤 했다. 다치고 나서 어그로꾼이 되었다. 나중에 자전거 사고 썰과 순례자 병원 간 썰도 자세히 풀 예정이다.


세어보니, '택시 3번 미만으로 타자'는 다짐은 지키지 못했다. 특히 막바지에, 택시를 참 많이 탔다. 주위 순례자들을 봐도 그랬다. 병원에 가기 위해, 축제를 보기 위해, 구간을 스킵하기 위해 어찌 됐든 바퀴의 힘을 빌리게 되더라. 그렇다고 비웃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각자에게 의미 있는 순례길이었으면 그만 아닌가. 흑흑,,,.


그래도 난 또 다짐한다. 다음에 순례길 가면 정말 택시 안 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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