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어 열 / 포토그래퍼 조아
* 성렬 님과의 인터뷰입니다.
영화와 친해지게 된 계기가 있다면
영화와는 CGV VIP였던 엄마의 소개로 가까워졌어. 아빠가 회식으로, 누나가 학원 때문에 늦는 날이면 이따금씩 엄마와 영화관으로 데이트를 하러 갔지. 또 우리 집 근처에 아웃백이 있었는데, 영화 관람권을 가져가면 코코넛 쉬림프를 무료로 제공해 주는 이벤트를 해서 여느 주말이면 영화를 보고 아웃백에 식사를 하러 가는 게 코스였어. 사실 엄마와 함께 봤던 영화들의 제목과 내용에 대한 기억이 흐릿한 걸 보면, 영화를 보는 것 자체도 즐거웠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 맛있는 식사를 하러 가는 게 너무나 좋았던 것 같아. 덕분에 영화에 긍정적인 추억이 엉겨 붙어있어 마음을 열게 된 것은 아닐까 싶어.
영화를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새내기 때부터. 모든 요일의 수업을 1시 이전에 마치게끔 시간표를 짜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기숙사에 틀어박혀서 노트북으로 2-3편씩 영화를 봤어. 20살 촌놈에게 서울이라는 도시와, 성균관이라는 캠퍼스는 너무나 크고 정신없는 공간이었거든. 기숙사에 들어와서 씻고 난 개운한 상태로 영화를 틀면 심신이 안정되는 기분이었달까.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경계 태세를 허문 무방비 상태에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이 세계 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데 안 빠질 수가 없었지. 밀려오는 여운을 누군가에게 잔뜩 떠들어주고 싶고, 소중한 감상을 쉬이 휘발시키고 싶지 않아서 인스타그램에 계정을 열고 1일 1 영화 프로젝트를 시작했어. 일명 ‘하루에 영화 한 편씩 보고 기록하기.’
1일 1 영화의 의미
영화는 2시간 속에 인생의 통찰을 집약한 훌륭한 매체라고 생각했어. 생각이 넓고 깊어지려면 책을 읽어야겠다 싶었고, 영화는 책 보다 빠르고 재미있게 교훈을 얻을 수 있으니까 책 대신 영화를 꾸준히 봐야겠다 싶었지. 업로드를 시작한 초반엔 팔로워들의 반응이 쏠쏠해서 할 맛이 났어.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반응도 사그라들고, 무조건 하루에 영화 한 편을 봐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다 보니 일처럼 느껴지며 흥미가 떨어지기도 했지. 힘에 부칠 때마다 ‘그래도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니까.’라고 되새기며 반복했어. 영화를 보고 기록하는 일이 이젠 일상이 됐네.
벌써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600여 편 넘게 기록해 왔어. 종종 지인들로부터 OTT에서 볼 영화를 고를 때 내 게시물에 혹해 영화를 선택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짜릿함을 느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면 일상으로 침투시켜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시간을 내서 하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순간임에도 소소한 벅차오름을 느끼게 되는지? 반복의 권태를 이겨낼 만큼 강력하다면 진정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인생영화가 있다면?
인생 영화가 있다는 건 어쩌면 위험한 일이지 않을까. 어느 한 작품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꿀 만큼 영향을 미쳤다는, 그 거창한 의미를 견딜 수 있는 작품이 과연 있을까 싶어서 웬만하면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해. 다만, 특정 시기에 마음에 꼭 와닿는 일시적인 최애 작품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하지.
근래 가장 애정하는 작품은 샬롯 웰스 감독의 ‘애프터썬’. 어릴 적 아버지와 떠났던 터키 여행을 어른이 되어 반추하는 소피의 이야기야. 캠코더에 남아있는 여행 영상을 되감아보며 당시엔 미처 포착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더듬어보는 과정을 담고 있어. 영화를 보고 나면 매번 드는 생각은 ‘인간은 왜 항상 한 발씩 늦을까.’ 후회에 대한 것들.
현재를 지나는 와중에는 주관적인 감정만 존재할 뿐, 깨달음은 늘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야 찾아오잖아. 머리가 커지고 상대의 상황을 이해하게 되면서 보이는 것들을 다 따지고 난 후. 그러고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후회하는 인간의 미련함이 참으로 절망스러울 때가 있어.
역설적이게도 후회를 줄이는 가장 큰 방법은 현재를 최대한 즐기는 거잖아. 카르페 디엠(Carpe Diem). 후회가 필연적인 것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제한된 현재지만, 미래의 내가 용서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했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지금의 최애 영화로 애프터썬을 꼽은 것도 어쩌면 후회하게 될지 몰라. 다른 별점 5점의 영화들이 서운했을 텐데… 하면서. 그렇지만 미래의 나도 분명 고개를 끄덕일걸. 너무 좋은 영화니까.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이동진 평론가의 책 중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라는 책이 있어. 영화를 보고 나면 명징하게 와닿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 모호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잖아. 영화관 문을 열고 나올 때까지만 해도 아리송하던 장면이 어느 날 ‘유레카!’ 하며 깨닫게 되어 나만의 영화로 완성되는 순간, 영사기에서 상영을 마친 영화가 우리네 삶에서 다시 상영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시간이 흐르고 삶의 경험치가 조금 더 쌓였을 때 열어보면 색다르게 읽히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처럼.
영태기(영화 권태기)가 오는 날이면 내가 사랑하는 영화들을 다시 꺼내 돌려보곤 해. ‘안 본 눈 삽니다.’의 심정으로 최대한 새롭게 느끼려고 노력함과 동시에, 사랑에 빠지게 된 장면을 통해 ‘그래, 이거지.’ 하면서 취향을 재확인하는 시간을 갖는 거지. 그러고 나면 우습게도 다시 영화가 보고 싶어 져. 샬롯 웰스의 ‘애프터썬’은, 폴 토마스 앤더슨의 ‘펀치 드렁크 러브’는,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은, 루카 구아다니노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몇 번이고 다시 시작되어도 지겹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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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를 늘 곁에 두고 살아가고 싶어. 꿈이 있다면 삶의 종점에서 인생을 돌아봤을 때 나를 수식하는 단어에 영화감독이 포함되어 있으면 좋겠다는 것. 당장은 겁이 많아서 시도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꼭 나만의 것을 만들고 싶어. 내게 영화는 인생을 걸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것이라고 믿으니까.
인터뷰어 열 / 포토그래퍼 조아
2024.09.29 성렬 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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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s of skku]
휴스꾸(Humans of skku)는 2013년부터 성균관대학교의 교수, 직원, 학생과 근처 상권까지 인터뷰 대상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장문의 인터뷰 본문, 깊이 있는 사진과 휴스꾸를 꾸려나가는 운영진의 이야기까지 다채로운 휴스꾸의 모습을 담아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