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그다드Cafe Oct 16. 2024

일을 잘한다는 것

기억력과 송쌤의 일침

바로 어제, 부장님 두 분과 함께 술을 곁들인 저녁을 함께 했다. 사실은 저녁을 곁들인 술자리라고나 할까. 여하튼, 부장 2 + 차장(나) 1 이렇게 세 명이서 술을 마셨다. 세 명의 나이를 합치면 한 150살쯤 되려나? 아무도 알아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유해하지도 않는 무색무취한 꼰대들의 저녁이었다.


여기서 잠깐, 직장인 맞춤 퀴즈.


'직장인 술자리에서 가장 맛있는 안주는?'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상사 뒷담화'이지 않을까 싶다. 일명, 이가탄 안주. (이가탄이 익숙하지 않으면 '인사돌 안주'로 치환 가능하다) 여기서 핵심은 지랄 맞은 상사 뒷담화이니 인사돌이든 이가탄이든 관대하다. 얼른 뒷담화를 해야해서 그렇다. 우리는 도합 150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멀리 출장  우리들의 공통 상사를 대상으로 우아한 이가탄 타임을 가졌다.


1시간이 넘게 씹고(안주를), 뜯고(상사를), 맛보고(술을), 즐기고(안주를), 또 씹고(상사를), 뜯고(상사를), 맛보고(안주를), 즐기고(술을) 했다. 더 이상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안주가 없어지고, 술이 떨어지자 대화는 시들어갔다. 그렇게 나는 끝나는 줄 알았다. 150년 산 술자리가.


그런데 그때, 부장님 중 한 분이 갑자기 질문을 했다.


'일을 잘한다는 게 머지?'


이 형, 취한 게 맞다. 취하지 않고서야 평소에는 잘하지도 못하는 일에 대해서 질문을 하다니... 나는 이미 이가탄 타임 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인지, 아니면 이미 술에 취해 꽐라가 되어서인지 이 질문에 답을 생각하기 싫었다. 그래서 그윽한 눈으로 다른 부장님을 쳐다봤다. 저 형은 머라고 대답할까?


'일을 잘한다는 건 결국 기억을 잘한다는 게 아닐까?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일을 잘하는 사람이야.'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동의할 수 없었는데 이가탄 타임 때 소진된 체력이 돌아오지 않아 제대로 된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대충 술자리를 수습했다.


오늘 일어나 보니 약간의 숙취가 있었고, 무엇보다 목이 아팠다. 치열한 이가탄 타임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그래도 나는 K직장인 아니던가, 무거운 머리를, 아픈 목을 지참한 채 출근을 위해 지하철을 탔다. 그런데 출근길의 개이득. 빈자리가 있었다. 숙취로 힘든 몸을 냉큼 빈자리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자려고 했으나, 숙취로 인해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숙취가 심하면 오히려 잠이 오지 않더이다) 그래서 브런치에 접속해서 라이킷을 눌렀다. 하지만 차마 글은 써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가방에 있는 책을 꺼냈다.


요즘 종이책은 송쌤의 <시대예보: 호명사회>를 읽고 있는데, 거의 막바지라 마지막 챕터를 남겨놓고 있었다. 나는 책을 폈다. 그리고 나는 뜬금없이 책에서 답을 구했다. 어떤 뜬금없는 답이냐? 바로 어제 이가탄 타임 이후 미처 답하지 못한 질문에 대한 답. 바로 '일을 잘한다는 게 머지?'에 대한 답.


책 내용을 우선 살펴보자.



무엇이든지 묻는 대로 척척 대답해 내는 사람을 '척척박사'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해 주는 척척박사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는 최대한 많은 사실을 기억하고 이를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는 힘을 가진 이가 지식인으로 불렸다면, 이제는 실시간으로 물어보고 그에 관한 답변을 이해한 뒤 다른 범주의 문제도 추론해 내는 이가 새로운 지식으로 불리게 될 것입니다. 세계가 더욱 긴밀하게 연결된 새로운 시대에 지식의 범위는 '전 지구 위, 오늘까지의 모든 정보'입니다.


이제 새로운 지식인이 갖춰야 할 덕목은 미리 저장된 지식을 끌어내는 방식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탐색하는 방식입니다. 이 경우 암기력보다 중요한 것은 맥락을 파악하고, 현명한 질문을 하며, 그 결과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시대예보: 호명사회> 중에서. by 송길영 작가님


그래! 이거야! 지금 시대의 기억력(=암기력)은 과거에는 일을 잘하기 위한 능력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쯤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홍... 

영화에 최고의 제목을 부여하는 그 분*. 제목짓기는 이미 월클 봉감독님과 이븐한 레벨인 그 분. 그리고 김민희 배우의 현 남친.


*개인적으로 <강원도의 힘>은 제목이 가진 임팩트가 <타이타닉>이나 <아바타> 정도 되지 않을까싶다.

기억력에 대한 시네마적 해석 및 분석

예전에 집집마다 필수품이 있었다. 바로 전화번호부 책. 지금처럼 개개인마다 핸드폰이 없었으니 얼마나 소중했을까? 30년 전, 내가 10살 즈음 나는 아버지의 칭찬을 듣기 위해 중요한 전화번호를 외우고 다녔다.


아버지: 만리장(중국집) 전화번호가 머꼬?

나: XXX-XXXX요.


아버지: 영도 할배(아버지의 친척) 전화번호가 머꼬?

나: XXX-XXXX요.


아버지: 연탄가게(어렸을 때 우리 집은 난방으로 연탄을 때웠다) 전화번호가 머꼬?

나: XXX-XXXX요.


아버지는 내가 전화번호를 외울 때마다 흐믓해하셨고, 그게 미래를 슬기롭게 살아가는 능력이라고 믿으신게 틀림없다. 마치 영어 단어를 외우듯이 중국집과 연탄가게와 쌀집의 전화번호를 외우게 하셨으니깐.


그때는 정말로 전화번호를 외우는 게 능력이었고 얼마나 많이 외우느냐가 실력인 시절이었다. 지금은? 전화번호를 알면 능력자 취급을 받지는 않는다. 외워도 나쁠 건 없으나 핸드폰이 있는 이상 굳이 외울 필요가 없다. 그만큼 시대가 요구하는 능력의 정의가 변화한 것이다.


일을 할 때 암기력이 중요하고 '척척박사'가 능력을 인정받던 시대는 저물었다. 지금은 온갖 Tool과 AI를 활용하면 된다. 핸드폰이 나오면서 전화번호부가 필요 없어진 것처럼 말이다. 시대에 맞는 능력이 무엇인지 다시금 고민해야 할 시기다.


p.s. 이 글은 나의 동료이자 술동무이자 AI시대 방황하고 있는 SJ 부장님께 드리는 헌정글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