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의 역설
오늘날 제조업은 인공지능, 로봇, 플랫폼 산업의 주목 속에서 때로는 낡은 산업으로 취급받곤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첨단 산업이라 하더라도 제조업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깊은 곳에는 언제나 제조업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제조업은 인간의 머릿속 생각을 기술과 공정을 거쳐 현실의 물건으로 변하게 하는 산업입니다. 예를 들어, 하늘을 날고 싶은 생각이 비행기가 되고, 지구 반대편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마트폰이 되는 과정 자체가 제조업의 역할입니다.
제조업이 사회에 미치는 절대적 가치
선진국 대열에 오른 나라들이 제조업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제조업만이 가진 대체 불가능한 가치들 때문입니다.
첫째, 제조업은 계층을 뛰어넘는 사다리 역할을 합니다. 제조업에서는 학벌이나 특별한 재능이 필수적이지 않으며, 평범한 사람도 성실히 일하고 기술을 익히면 삶이 나아질 수 있습니다. 숙련공이 되면 중산층으로 올라설 수 있는 경로가 열리는 것입니다. 고등 교육 없이도 경험이 기술로, 기술이 곧 임금 상승으로 이어지는 거의 유일한 산업이며, 이를 통해 수많은 사람이 빈곤층에서 중산층으로 진입했습니다.
둘째, 부의 재분배 장치입니다. 제조업은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부품, 운송, 하청업체까지 이어지는 광범위한 산업 생태계 전체가 함께 소득을 나누도록 합니다. 이는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금융업이나 플랫폼 산업과는 비교되는 지점이며, 압도적인 고용 규모와 경제 전반으로 퍼지는 엄청난 파급력을 가집니다.
셋째, 민주주의와 사회 통합의 기반입니다. 제조업으로 다져진 중산층은 세금을 내고 투표하며 사회 제도에 참여하는 공동체의 중심이 됩니다. 사회의 건강은 소수의 천재가 아닌 다수의 평범한 사람이 얼마나 존중받는 삶을 사느냐로 결정되는데, 평범한 다수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은 제조업의 중요한 기능입니다. 이 중산층이 줄어들면 사회는 자본과 불안정한 노동이라는 양극단으로 갈라져 갈등과 불신에 직면하게 됩니다.
선진국에서 제조업이 사라지는 역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이후 선진국들은 공장을 개발 도상국으로 옮기는 '오프쇼어링'을 시작하며 제조업의 비중을 빠르게 줄였습니다. 경제가 일정 수준에 이르면 제조업이 자국 내에서 견디기 어려운 필연적인 이유들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생산 원가를 올리는 인건비와 복지 비용입니다. 제조업은 본질적으로 노동 집약적이어서, 선진국에서는 높은 임금뿐 아니라 근로 시간 단축, 휴가 보장, 의료보험 및 연금 같은 복지 제도까지 갖춰야 하기에 생산 원가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또한, 환경 규제와 사회적 비용의 증가도 주요 요인입니다. 소득과 시민 의식이 높아질수록 사회는 더 이상 오염을 감수하려 하지 않습니다. 철강, 자동차, 화학 같은 산업은 '더러운 산업'으로 불리며 규제가 느슨하고 비용이 싼 해외로 이전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기술 고도화에 따른 폭증하는 투자 비용입니다. 경쟁 심화로 자동화와 로보틱스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초기 투자 비용이 막대하게 증가하며, 일부 초대형 기업이 아니면 감당하기 어렵게 되어 제조업은 대기업 중심으로 재편됩니다.
일반적으로 1인당 GDP가 2만~3만 달러가 되면 제조업 비중이 정점을 찍고 하락하기 시작하며, 3만~5만 달러 구간에서는 국내 생산을 감당하기 어려워져 대거 해외로 공장을 옮기는 본격적인 축소가 진행됩니다.
제조업 붕괴가 초래하는 사회적 균열
제조업의 붕괴는 단지 산업 하나가 사라지는 것을 넘어 사회 전반의 균형을 깨뜨립니다. 붕괴 과정은 보통 아웃소싱, 오프쇼어링, 산업 생태계 해체의 순서로 진행됩니다.
제조업이 무너지면, 앞서 언급했던 중산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걷어차입니다. 남는 것은 단기 계약직이나 불안정한 저임금 서비스업뿐이며, 노력해도 나아질 수 없는 사회가 됩니다. 또한 공장은 지역 경제의 심장이었기에, 공장이 문을 닫으면 식당, 학교, 병원 등으로 촘촘히 연결된 지역 공동체가 함께 무너집니다 (미국의 러스트벨트, 영국 북부의 사례).
기술 단절 문제도 심각합니다. 제조업은 기술과 경험이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세대 간 전승 산업인데, 공장이 해외로 이전하면 이 기술 이전이 중단되어 혁신과 창조가 사라지고 기술의 운용만 남게 됩니다.
결국, 제조업이 사라지면 경제는 기술·금융·법률 같은 고임금 산업층과 저임금 서비스업층으로 쪼개지면서 중간층이 사라집니다. 부는 더욱 집중되고 불평등이 고착화되어, 그 분노가 MAGA, 브렉시트, 노란 조끼 운동과 같은 사회적 균열로 터져 나오게 됩니다. 또한 생산을 해외에 의존하게 되면 국가가 돈은 많지만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는 안보 불안 상태에 빠지게 되며, 최대 세수 원천도 사라지게 됩니다.
제조업을 지켜낸 독일과 일본의 방식
다행히 모든 선진국이 제조업을 잃은 것은 아닙니다. 독일과 일본은 제조업 비중을 20% 안팎으로 유지하며 예외적인 성공을 보여주었습니다.
독일은 제조업을 값싸게 유지한 것이 아니라, 비싸도 버틸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핵심은 전국에 흩어진 중소기업, 즉 '미텔슈탄트'입니다. 이들은 가격이 아닌 품질과 숙련된 기술력으로 경쟁하며, 기계 부품, 정밀 공구 같은 분야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지탱하는 것은 청소년들이 기업에서 일하고 직업 학교에서 공부하는 이원제 직업 교육 시스템 덕분입니다. 숙련공이 끊임없이 배출되며 장인으로 존중받는 사회 분위기가 제조업의 근간을 이룹니다.
일본은 1990년대 이후 제조업 비중 약 20%를 유지해 온 제조 강국입니다. 일본의 강점은 생산 과정 전체를 하나처럼 움직이는 통합 체계입니다. 부품, 소재, 완성품, 품질 관리까지 하나의 생태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외부 충격에 강합니다. 또한, 인건비가 올랐을 때 공장을 해외로 옮기는 대신 로봇을 대거 도입해 생산의 절반 이상을 자동화함으로써 경쟁력을 유지했습니다.
한국의 분기점: 제조업을 지키느냐 잃느냐
현재 한국은 1인당 GDP 3만~4만 달러 구간에 들어서 있으며, 이는 제조업이 본격적으로 축소되기 시작하는 시점 사이입니다. 지금이 제조업을 지키느냐 잃느냐를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입니다.
한국은 현재까지 GDP의 약 4분의 1이 제조업에서 나오며, 이는 미국, 영국보다 훨씬 높고 독일보다도 약간 높은 수치입니다. 반도체, 배터리, 자동차 등 고부가 산업이 주력으로 자리 잡았으며, 동시에 AI, 로봇 같은 디지털 산업으로도 빠르게 전환하는 '제조업 황금기와 디지털 전환기가 겹친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를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의 산업 구조는 미국처럼 완전히 해외에 의존하지도, 일본처럼 모든 공정을 국내에 두지도 않은 절충된 형태입니다. 하지만 국민 소득이 늘면 늘수록 오프쇼어링의 압력을 더 크게 받게 될 것입니다.
영국이나 미국은 내수 시장이 크기 때문에 제조업을 잃고도 서비스 중심으로 전환하여 여전히 부유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내수가 작고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한국에서 제조업이 무너진다는 것은 단순히 산업 하나를 잃는 것을 넘어 국가의 미래를 잃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독일식이든 일본식이든 정답은 없지만, 제조업의 가치를 재인식하고 이 압박을 견뎌내는 것이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 이글은 "제조업이란 무엇인가? AI도 대신할 수 없는 제조업만의 가치" 의 요약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