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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칭찬해도 내 마음에 닿지 않는다

by 이확위
"좋은 아이디어네요."


이번에도 보스가 내게 말했다. 프랑스에서 돌아와 일하기 시작한 지 일 년 반 가까이 되어가는데, 내가 제시하는 95%의 아이디어에 "좋은 아이디어"라고 말하곤 했었다. 나는 엄청 고심 끝에 생각해 낸 것들이 아니라, 어쩌다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해서 보고하곤 했던 것이기에- 이런 잦은 칭찬이 의아했다. 그저 사람 좋은 보스가 좋은 말을 하는 거라 생각하곤 했다. 나는 나를 믿지 못하니까.


내 친구는 내게 스스로를 좀 인정해 주라고 말하곤 한다. 내가 하는 것에 언제나 칭찬을 아끼지 않지만, 아닌 것에는 냉혹하게 조언해 주는 친구이다. 그런 친구이기에 친구의 조언이 믿음직하지만- 워낙 전공분야가 다르기도 하고 업무에 대해서는 물어볼 수 없는 노릇이니 친구의 평가를 받을 수가 없다. 어쩐지 친한 친구들도 같은 학과를 나왔음에도 같은 길로 걸어온 친구가 없어 내 아이디어들에 대한 생각을 들을 수가 없다. 그러니 그저 자존감이 낮아 언제나 스스로를 의심만 하고, 자신이 부족하다 느끼는 내 마음으로 평가할 수밖에.


나는 여전히 우울과 불안이 가끔 찾아오긴 하지만, 예전처럼 심하지 않고 오히려 아주 컨디션이 좋은 기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몇 주간 머리가 아주 활발히 돌아가면서, 그때는 이런저런 아이디어들이 샘솟아서, 이들에 대해 더 알아보려는 욕구를 참기가 어려워 매번 정리해 두고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보고하곤 한다. 그럴 때면 보스는 언제나 좋은 말을 하곤 했다. 그리고 매번 해보라 말했다. 하지만 아이디어의 수가 내가 행동할 수 있는 것보다도 너무 많아 실행하여 증명할 결과들이 쌓여만 있다.


사람 좋은 보스만 내게 좋다 말한 것은 아니었다. 나름 세계적인 석학인 해외대학의 교수님 연구실과도 함께 미팅을 하며, 함께할 아이디어로 세 가지 연구를 제안했다. 세 가지가 모두 논리적이고 그럴듯하다며 해보자고 말했다. 그때도 미팅 전에, 나에게 아이디어들을 발표하라는 보스의 말에 속으로 '내가?' 하는 생각에 별로라고 할 것만 같아 엄청 긴장을 했더랬다. 괜찮다는 말도, 어쩐지 그 유명한 해외 교수조차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에 그냥 좋게 말한 거니 싶었다.


다른 학과의 유명 교수님과의 미팅도 있었다. 이 또한 공동연구였는데, 이번에도 세 가지 정도를 제안을 했다. 세 가지를 모두 시도해 보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또 다른 교수님에게도 보스가 내가 제시한 공동연구와 내 실험 결과를 전달했다. "흥미로운 결과네요"라며 함께 해보자는 답변을 들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방 학생이 "교수님이 흥미롭다고 하시는 거 처음 봤어요."라고 하더라. 그분이 그렇게 말한 거면 진짜 좋았던 거일 거라 했다.


이런 건 연구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며칠 전, 코비드 이후 처음으로 친구와 함께 음악 페스티벌을 즐겼다.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한 카페에서, 내가 가방 안에 있던 빈 엽서 종이들을 구경시켜 주던 중이었다. 친구가 문득 나에게 "이거 그려봐."라고 말했다. 눈앞에 먹던 피칸파이가 있었는데 친구가 어려워 보인다며 그려보라 했다.

"이거 그려봐."

"이거?"

"응. 어려워 보여. 한번 해봐."

"이건 그냥 대충 그리면 될 거 같은데."

"이걸?"

그렇게 펜을 잡고 그냥 슥슥 그려가기 시작했다. 그림에 대해서 나의 나름의 철칙이 있는데, 그건 바로 "잘하려고 애쓰지 말 것."이었다. 나는 기초 테크닉이 부족해서, 그냥 되는 대로 자유롭게 편하게 그려야 한다. 그러다 어쩌다 괜찮게 그려진 게 나오기도 하니까. 또한 어디까지나 취미로 하는 것이기에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망하면 다시 그리면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잘 그리려 애쓰지 않는다. 그래서 연필로 미리 스케치를 한다거나 하지 않고 바로 펜을 잡고 되는 대로 그려나간다. 내가 과감하게 펜을 잡고 그냥 그리기 시작하자, 앞에 있던 친구가 휴대폰을 들어 그림을 그리는 나를 찍기 시작했다. 나는 '딱히 잘 그린 것 같지 않고 그냥 할 수 있는 대로 7분 동안 그렸다.

"우와. 잘 그렸는데?"

"이게? 잘 그린 건 아니지. 그냥 그리는 거야."

"아니야. 몇 분이지? 7분? 스케치도 없었잖아."

"그냥 그리는 거야."

이런 얘기들을 나누는 데 친구가 말했다. 자신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 내가 하는 말이 어떤 마음으로 하는지 알지만, 나를 모르는 이들을 오해할 거 같다고.

"누군가는 재수 없다 할 수도 있겠어. -그냥 하는 거예요~ 잘난 체한다 생각할지도 몰라."


스스로에 대해 자신이 없기에,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친구가 말했다. 누구나 하는 건 아니라고. 지금 내가 쉽게 한다고 하는 것들도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게 있으니 그런 거라고 말이다. 그러니 스스로가 해왔던 노력들로 인해 쌓아 올린 실력을 폄하하지 말라고 말해줬다.


오늘도 몇 주전 공동연구진에게 전달했던 연구 아이디어에 대한 답변을 보스로부터 전해 들었다. 해당 연구 주제에 공동연구 교수님이 흥미로워하셔서 추가로 만나서 설명을 듣고 싶었다고 말이다. 여전히 스스로를 의심하는 나이기에, 이번에도 OK라는 게 의아했다.


나는 항상 나의 일에 대해 나 스스로가 객관적으로 평가하려 애쓴다고 생각했다. 주관적으로 스스로에 취해 별 볼 일 없는 것들을 과대평가한다며 스스로에게 취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어쩌면 오히려 내가 나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를 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친구의 말처럼 내가 나 스스로에게만 너무 냉혹한 게 아닐까 싶었다.


이런 나를 의심하는, 낮은 자존감과 자신감이 내 삶을 힘들게 만든 건 맞다. 나에게 만족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랬기에 나는 언제나 무언가를 하려고 했고, 더 나아지고자 계속 무언가를 해왔다. 일종의 내 성장의 원동력이라고나 할까? 나는 그래서 매번 가만히 있지 않고 조금이지만 더 나은 내가 되어가고 있다 생각했다. (항상 여전히 부족하다 느끼지만.) 누군가 삶의 목표가 뭐냐고 물을 때면, "나 자신에게 만족하는 거요."라고 말하곤 했는데, 문득- 내가 나에게 만족해 버리는 순간이 두렵기도 하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더 애쓰지 않고 그 자리에 안주해 버릴 것만 같아서. 그런 나 자신을 생각하면 조금은 불안함과 싸워가면서도 지금과 같은 내가 더 나은 게 아닐까 싶었다.


나의 꿈이 정말 "나 자신에게 만족하기"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겠다.


친구가 찍어준 7분간의 피칸파이 드로잉 (x16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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