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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by 유환희
“Spider”


사진 속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만개한 노란 꽃들이 아니다. 화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이미 생을 다한 듯 까맣게 변해버린 중심, 말라붙은 꽃의 얼굴이다. 빛나던 꽃잎은 사라지고, 검게 타오른 흔적만이 남아 있다. 그것은 주변의 활달한 생명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지만, 동시에 그들조차 필연적으로 맞이할 소멸의 순간을 예고한다.


김수영의 시 「거미」는 바로 이 ‘검게 타버림’의 정동을 기록한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시인은 설움이라는 정념 속에서 소진된 자신의 존재를 ‘거미’에 빗대며, 바람에 흔들리며 늙어가는 육체의 파멸을 노래한다. 사진의 중심부에 위치한 까만 꽃은 마치 김수영의 ‘거미’와 겹쳐진다. 그것은 단순한 죽음의 표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끝없이 설움과 맞닿으며 스스로를 소진시킨 흔적이다.


하이데거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 장면은 존재가 시간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의 문제다. 꽃은 피어남으로써 이미 시듦을 내포하고, 시듦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피어남의 진리 그 자체다. 존재는 항상 그 끝을 향해 나아가며,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으나 언제나 이미 와 있는 것’으로서 현재를 규정한다. 사진은 바로 이 시간성의 구조를 가시화한다. 활짝 핀 꽃들이 ‘아직 살아 있음’을 증언한다면, 중앙의 검은 꽃은 그들의 시간 속에 언제나 함께 놓여 있는 죽음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라캉적 어휘를 빌리면, 이 검게 탄 꽃은 상징계 속 질서로 포섭되지 않는 실재의 흔적이다. 우리는 ‘꽃’이라는 부름 속에 생명의 상징을 기대하지만, 화면은 그 기대를 배반한다. 활짝 핀 노란 꽃잎이 상상계의 화려한 이미지라면, 중심에 놓인 검은 꽃은 그 모든 상징적 서사의 균열을 드러내는 실재의 구멍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명명에 실패하게 만들며, 결국 존재의 심연을 직시하게 한다.


결국 이 사진은 단순한 꽃의 기록이 아니다. 이는 존재가 시간 속에서 어떻게 ‘피어남-시듦-사라짐’의 연속으로 펼쳐지는지를 증언한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의 삶과도 겹쳐진다. 김수영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모두 설움과 입을 맞추며, 살아 있음 자체로 서서히 까맣게 타들어간다. 그러나 바로 그 타버림 속에서만 존재는 자기 진실을 드러낸다.


사진은 말한다. 생은 언젠가 검은 중심으로 돌아가고, 그 잔여는 우리를 두렵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존재로서 각성시킨다고. 우리는 모두 언젠가 까맣게 타버릴 꽃이지만, 그 순간까지 피어나고 시듦을 반복한다. 그것은,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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