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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들려주는 이야기

서산 부석면 - 버드랜드, 간월도

by 유환희

지역을 이해하는 것은 그 땅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에서부터 출발한다. 서산의 땅은 오랜 세월 이어진 간척의 결과이기도 하다. 한때는 항구였던 곳이 내륙 마을이 되고, 한때는 바다였던 곳이 드넓은 평야를 이룬다. 그런 땅을 찾는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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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의 땅은 늘 움직이고 있었다. 바람이 지나가면 땅이 물결치고, 물이 빠져나가면 흙이 숨을 쉬었다. 나는 그 숨소리를 들으려 서산 버드랜드에 섰다. 하늘은 구름의 결을 따라 찢어진 듯 열려 있었고, 그 사이로 철새들이 길게 날아올랐다. 몸을 낮춘 채 날개짓을 멈추고 잠시 공중에 정지하는 새들의 모습은, 마치 이곳의 시간도 잠시 멈춘 듯한 착각을 불러왔다.


철새는 언제나 떠나는 존재지만, 그 떠남이 곧 돌아옴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곳에서 배운다. 수천 킬로미터를 건너온 새들이 갯벌 위에 내려앉을 때, 나는 그 가벼운 발끝이 땅을 어루만지는 순간을 바라본다. 그 순간,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서산 간척지와 자연이 만들어낸 습지가 묘한 화해를 이룬다. 사람은 땅을 빼앗아 농사를 지었고, 그 땅의 경계를 따라 바다를 밀어냈다. 그러나 그 바다의 기억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철새의 발자국으로, 갯벌의 숨결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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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척지는 인간이 바다를 이해하는 가장 솔직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바다를 밀어내는 동시에 그 바다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모순된 시도. 그 위를 걷다 보면 땅은 단단하면서도 눅눅하다. 발끝에 닿는 감촉이 흙인지 진흙인지, 물인지 바람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그 모호함이 서산의 땅을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언어다. 완전히 육지도 아니고, 완전히 바다도 아닌 땅. 늘 사이에 있는 존재. 마치 인간이 자연 앞에서 느끼는 경계의 불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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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버드랜드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간척지는 거대한 시간의 지도였다. 물길이 사라진 자리마다 바람이 그린 선들이 있고, 그 선 위로 철새들이 그늘을 남긴다. 햇빛은 수평선에서부터 시작해 논두렁 끝까지 미끄러지고, 흙 위의 미세한 반짝임은 금속처럼 냉정했다. 그러나 그 냉정함 속에서도 살아 있는 온기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이 겹쳐진 온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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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기울 무렵, 나는 간월암으로 향했다. 갯벌 위에 떠 있는 듯한 절은, 바다의 물이 들어올 때면 섬이 되고, 썰물 때면 길이 드러난다. 그 길은 늘 잠시만 열린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길은 늘 그런 식으로 열린다. 완전히 내 것이 되지도 않고, 잠시 스쳐가듯 보였다가 사라진다. 간월암으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나는 물러나는 바다를 바라본다. 바다는 잠시 물러나지만 결코 떠나지 않는다. 그 흔적은 물결의 문양으로 남아 다시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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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이 시작되면 갯벌은 또 다른 세계로 변한다. 붉은 빛이 서서히 흙 위에 내려앉고, 그 위를 걷는 사람들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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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바다의 경계에 닿을 때, 간월암의 지붕이 불빛처럼 타오른다. 그 순간, 모든 소리가 사라진다. 멀리서 새가 한 번 울고, 물이 한 번 숨을 쉬고, 세상은 고요 속으로 가라앉는다. 나는 그 고요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 침묵 속에서 땅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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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의 갯벌은 생명의 출발점이다. 겉으로는 고요하고 죽은 듯 보이지만, 그 속은 무수한 생명으로 들끓는다. 작은 게들이 구멍을 파고, 조개가 바닥을 미끄러지며, 흙 속의 미생물들이 숨을 쉰다. 이 미세한 생명들이 만들어낸 생태계 위에서 철새가 날고, 인간이 살아간다. 그 관계의 층위를 보고 있으면, ‘땅’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물질이 아니라 시간의 저장소임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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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의 땅은 결코 조용하지 않다. 다만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멈춰 서야 한다. 나는 버드랜드의 전시관에서 철새의 이동 경로를 그린 지도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 화살표들이 인간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떠남과 돌아옴, 반복되는 계절, 그리고 그 사이에서 쌓여가는 기억들. 서산의 철새들은 단순히 계절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이주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날개 끝에는 먼 나라의 바람이 묻어 있고, 그 바람이 다시 이곳의 공기와 섞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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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서산은 늘 타인과의 교차점 위에 존재한다. 바다와 땅, 새와 사람, 낮과 밤, 자연과 인공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드는 곳. 그리고 그 경계의 흔들림 속에서 이 땅은 스스로의 리듬을 만든다. 나는 그 리듬을 사진으로 담으려 했다. 그러나 셔터를 누를 때마다 알았다. 서산의 풍경은 찍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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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완전히 넘어간 뒤에도 갯벌은 여전히 빛을 품고 있었다. 바다의 잔광이 흙 위에서 미세하게 반사되어, 마치 별이 내려앉은 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나는 그 빛이 단지 석양의 잔재가 아니라, 이 땅이 오래전부터 품어온 기억의 형상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바다였던 시절의 기억, 갯벌로 남은 생명의 기억, 그리고 그 위를 걸어간 인간의 발자국까지. 모든 시간이 이 땅 속에서 겹겹이 침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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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도를 떠나는 길에 다시 철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멀리서 들려왔지만, 이상하게 가깝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것은 이 땅이 나에게 남긴 인사 같았다. 서산의 땅은 그런 곳이다. 떠남이 곧 귀환이고, 끝이 곧 시작인 곳. 물러난 바다와 남은 땅이 서로를 기다리는 자리.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세상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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