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 보원사지, 부춘산 전망대에서 본 서산
서산의 보원사지는 황량했다. 절은 사라지고, 사람의 기척도 없었다. 가을빛은 들녘 끝에서 바래고 있었고, 바람만이 탑의 균열을 따라 흘러들었다. 그 바람이 지나가는 자리에 오래된 돌의 체온이 스며 있었다.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그것은 서 있는 게 아니라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때는 법당이 있었고, 염불 소리와 목탁이 돌았던 공간일 것이다. 지금은 그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무너진 기왓조각들만이 남아 햇빛 아래 반사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잔해들 속에서, 나는 묘하게 살아 있는 기운을 느꼈다. 부서지고 깨어졌으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 그것이야말로 ‘시간’의 실체 같았다.
보원사지는 단순히 유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남은 것의 자리’였다. 석탑의 단면에 낀 이끼는 계절의 층위를 그대로 품고 있었고, 균열진 돌틈으로는 바람보다 느린 세월이 스며들고 있었다. 인간이 만든 형상은 무너졌지만, 무너진 뒤에야 그 형상의 진실이 드러나는 법이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곳은 ‘없어진 절’이 아니라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절이다. 사라짐의 속도를 견디는 돌들, 무너진 자리에서 여전히 제 역할을 하는 그림자들. 그것이 보원사지의 시간이었다.
부춘산 전망대에 오르자, 전혀 다른 서산이 펼쳐졌다. 아래로는 도시의 등줄기가 반듯하게 이어졌고, 그 사이로 가을의 햇살이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낡은 절터에서 보았던 황량함이 여전히 마음 한켠에 남아 있었지만, 그 위에 겹쳐진 이 풍경은 이상할 만큼 따뜻했다. 보원사지가 사라진 것들의 시간이라면, 부춘산 전망대에서 본 서산은 여전히 살아 있는 시간의 얼굴이었다. 오래된 시간 위에 쌓여 만들어진 현재의 풍경은, 잃어버림과 존재가 공존하는 증거처럼 보였다.
도시의 불빛은 아직 켜지지 않았고, 해는 서쪽 능선 너머로 천천히 기울고 있었다. 하늘은 붉지도, 푸르지도 않은 미묘한 색으로 번졌다. 그 빛 속에서 서산의 건물과 길, 사람들의 하루가 하나의 결로 묶였다. 이 풍경에는 결핍이 없었다. 오히려 그 안에는 지난 세월이 남긴 흔적들이 보이지 않게 스며 있었다. 도시는 사라진 절터를 잊은 듯하지만, 그 위에 놓인 시간은 여전히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보원사지의 돌이 품고 있던 침묵이, 부춘산의 바람 속에서 다시 움직이는 듯했다.
나는 그 풍경을 오래 바라봤다. 오래된 절터의 황량함과, 그 위에 쌓인 지금의 풍경이 서로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잃어버린 것과 남아 있는 것은 서로 반대편이 아니라, 같은 시간의 두 얼굴이었다. 한쪽은 끝나버린 세계의 흔적을, 다른 한쪽은 여전히 계속되는 세계의 호흡을 품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 도시 위로 노을이 퍼졌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가 한순간 섞이는 장면이었다. 나는 그 빛 속에서 보원사지의 돌과 탑을 다시 떠올렸다. 돌이 남아 있는 이유는 무너지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너진 뒤에도 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도시의 불빛도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 불빛의 잔상, 그 시간의 온도는 오래 남을 것이다.
서산은 그렇게 존재한다. 하나는 사라진 절의 자리에서, 또 하나는 지금의 도시 위에서. 보원사지의 돌은 시간의 무게를 견디며 서 있고, 부춘산의 바람은 그 시간을 다시 움직인다. 잃어버린 것과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그 두 시간 사이에서 서산은 지금도 살아 있다. 그리고 그 살아 있음은, 무너진 돌의 침묵처럼 조용하고 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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