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나는 신비주의에 빠져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오쇼 라즈니시의 법구경]를 읽은 뒤 관련 책들을 탐독한 결과였다. 깨달음을 얻어 윤회의 사슬을 끊을 것이다. 내 안에는 신이 존재한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풋내기가 하기에 적절한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진지했다. 그래서 매일 요가하고 명상하고 류시화, 크리슈나 무르티, 라즈니쉬 등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인도를 가야지. 갠지스 강에서 명상을 하는 거야. 그런데 군대도 가야 되잖아? 아, 그럼 일단 한국에서 출가를 하자. 스님이 된 뒤에 군종병으로 군대를 다녀오고 인도로 건너가 득도하는 거다-라고 나름의 계획을 세웠다. 참으로 완벽한(?) 플랜이었다. 담임 선생님한테 가서 출가해서 스님이 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래라. 부모님 도장받아와.라는 답을 들었다. 나는 당시에 학교에서 여러 맥락으로 이상한 아이로 통했기 때문에 선생님의 수긍을 이끌어내는 것은 쉬웠다. 고무된 나는 자퇴서를 들고 집으로 왔다.
부모님께는 그 일주일쯤 전부터 ‘나 자퇴하고 출가할 거야’라는 얘기를 했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 말이 농담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내가 정말 자퇴서를 들고 집에 왔더니 어머니는 우셨다. 조금 뒤 아버지가 퇴근하셨다. 아버지 앞에 자퇴서를 들이밀었다. 그리곤 일생일대의 프레젠테이션을 펼쳤다. 출가한 뒤 군대 문제를 해결하고... 어쩌구... 인도에 가서... 저쩌구... 득도를 하면... 어쩔 시구... 사뭇 진지하게 웅변하는 내 모습을, 아버지는 묵묵히 바라보았다.
“술이나 한 잔 하자.”
아버지가 데리고 간 곳은 집 앞 술집 투다리였다. 당시만 해도 미성년자 민증 검사 같은 걸 빡세게 하지도 않았던 터라 나는 마치 친구처럼 아버지와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치킨과 소주 두 병을 시켰다. 평소 그렇게 좋아하는 치킨이었으나 워낙 심각한 분위기라 치킨에 손이 가지도 않았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주를 각 일 병씩 마셨다. 아버지의 주량도 소주 한 병 정도였고, 나는 제대로 술을 먹은 게 그 날이 처음이었으므로 우리 둘 다 취기가 꽤 올랐을 것이다. 가게에 들어간 지 삼십 분도 되지 않아 꽤 취기가 오른 아버지가 처음 입을 열었다.
“정말 자퇴를 해야겠냐?”
“네.”
“알았다. 그럼 자퇴해라.”
아버지가 일어섰다. 나도 덩달아 비틀대며 일어났다. 이렇게 쉽게 허락이 날 줄이야!!! 나는 이제 자퇴를 하는 것이다!! 잔뜩 취했지만 술을 먹었다는 사실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는 군말 없이 자퇴서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나는 소중한 자퇴서를 가방에 넣고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내일이면, 모든 게 끝이다. 그리고 새로운 삶이 시작될 것이다. 나는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에 간다.
내가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에 도착한 건 30분 뒤였다. 비몽사몽 중에 누군가가 날 깨워 일어났다. ㅇㅇ야, 일어나. 일어나. 정신을 차려보니 아버지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술이 덜 깨 정신이 없었다. ㅁㅜㅓ라ㄱㅗ요오오?? 아버지는 웅얼대는 날 거실로 끌고 가 사정없이 패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날 밤 아버지의 입장은 이러하다. 아들놈이 원하는 대로 해주긴 했는데 그 뒤에 자려고 누워보니 너무나 화가 났던 거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려다 말고 뛰쳐나와 저 괘씸한 놈을 때려잡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취해서, 자다 깨서 두드려 맞는 맛은 물론 달콤하더라. ^^ 물론 맞는다는 게 주먹으로 폭행당했다는 건 아니고 몽둥이로 맞았다. 정정당당하고 이치에 합당한 매타작이었다. 어머니는 옆에서 울고. 동생도 옆에서 울고. 나도 울고. 아버지도 울고. 온 가족이 울다 보니 시간도 한참 흘렀다. 아버지는 내 자퇴서를 찢어버린 뒤 방에 들어가셨다.
내 방 침대에 엎드려 한참을 울었다. 아니 자퇴해도 된다며... 남자답게 1대 1로 술 마시면서 약속해놓고 이게 뭐야!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가 깨니 다음 날 등교시간이 됐더라. 기세 좋은 아이라면 학교 안 간다며 버틸 만도 하건만 줏대도 소신도 없던 나는 (위에 득도 운운하던 인간과 동일인물 맞음) 매타작 한 번에 자퇴의 꿈을 고이 접어 날려버렸다. 그래서 그 뒤에 어떻게 됐냐고? 절뚝대며 잘 등교했고 선생님의 비웃음을 받았고 학교 잘 다녔다는 얘기지.
이게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맞아본 사건이다. 지금도 가끔 생각해본다. 그때 내가 맞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아들의 의사를 완전히 존중해주는 사람이라 자퇴를 하게 됐다면. 출가를 했다면. 그럴 때마다 등에 식은땀이 흐르곤 한다. 아들을 키우면서 고1 때까지 때릴 일이 없었다면 그것은 그 아이가 매우 착하거나 부모님이 무관심하거나 혹은 인내심이 강하거나일 것이다. 나는 착한 아이가 아니었지만 다행히 나의 아버지는 오래 지켜봐 줄 줄 아는 분이었다. 아버지가 날 때리기 전까지 가졌을 고민의 깊이는 알지 못하지만 나는 적어도 그가 노력했다는 것은 알았고 그 마음은 충분히 전해받았다. 가만히 지켜보다 가장 크게 엇나갈 뻔했던 순간에 아버지는 날 건져 올렸다. 호밀밭에서 아이들이 떨어질 것을 걱정하던 홀든처럼, 파수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