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C를 걷다 보면 중간중간에 카페 같은 곳이 나온다. 대부분 로지를 겸하고 있고, 음식을 팔고 있어서 트레커들이 휴식을 취하고 음식을 먹으며 쉬는 장소다. 산티아고 길에서는 중간중간에 카페가 많이 나온다. 잠시 쉬며 음식을 사 먹고, 화장실도 사용하며, 쉴 수 있는 휴식의 장소이다. 산티아고길의 카페와 같은 곳이 ABC에서는 로지다. 트레커들과, 포터, 그리고 동네 주민들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인 로지는 ABC 트레킹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공간이다. 저녁에는 잠을 자는 공간, 걷는 중간에는 휴식을 취하고 음식을 섭취하는 공간, 트레커들이 모여 정보를 주고받고 서로를 격려하는 공간, 포터들이 쉬어가는 공간, 동네 주민과 소통하며 이들의 삶의 양식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로지 앞에 “막걸리는 여기서 구매 가능해요.”라는 문구를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독어로 ‘맥주가 있어요. “라든가, 일본어로 ”사케를 팔아요. “라든가, 영어로 ’ 위스키가 있어요.”라는 문구는 찾아볼 수가 없는데, 로지에 갈 때마다 대부분 막걸리가 있다는 문구를 볼 수 있다. 게다가 김치찌개, 라면, 볶음밥 등을 판매하고 있다는 문구도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스테이크를 판다거나, 바케트 빵을 판다는 문구는 보지 못했다. 이 문구를 보며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동시에 약간 창피하다는 생각도 든다. 굳이 이런 곳까지 와서 막걸리를 마셔야 할까? 음식의 경우는 현지식이 맞지 않을 수도 있으니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굳이 이런 오지까지 와서 막걸리를 마시며 걸어야 할까? 목이 마르면 현지에서 파는 맥주도 있고, 코카콜라의 짝퉁 격인 클럽콜라를 마실 수도 있다. 그리고 각자 준비해 간 물을 마시며 걸을 수도 있다. 나의 경우에는 아침 식사를 한 후 뜨거운 물을 받아 그 물로 음료수를 대신하며 걸었다. 걷는데 전혀 불편하지도 않았고, 목이 말라 힘든 경우도 없었다.
이 문구를 보며 어릴 적 산에서 보았던 바위에 새겨진 큰 글씨가 기억난다. “000 다녀가다.”, “000와 000.”라며 자신과 친구의 이름을 바위에 각인한 글씨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이런 행위는 금지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자신의 이름을 산의 바위에 새기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을까? 어리석은 치기에 불과할 뿐이다. 게다가 이는 자연훼손에 해당된다. 아무 생각 없는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새기며 바위에 상처를 낸다. 그냥 바위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며 바위처럼 세상 풍파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다면 다양한 방법이 있다. 한 분야의 최고가 되면 된다. 또는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일에 최선을 다하면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며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 자신의 희생으로 남의 목숨을 구한 사람은 의인이라 부르며 그 의인의 기일에 모여 일본과 한국에서 기념행사를 하기도 한다.
로지에서 쉴 때마다 술을 마시는 사람도 있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이고 습관이기에 이들을 나무라고 싶지는 않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이 길을 걷는 중간에 로지에서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본 기억은 없다. 로지에 일찍 도착해서 하루를 마무리하며 삼삼오오 모여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며 맥주 한 잔 마시는 외국인들의 모습은 보았다. 하지만, 길을 걷는 도중에,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로지에서 술을 마시는 모습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나 역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가능하면 걷는 중간에는 술을 마시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길에 대한 예의고, 걷는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에티켓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고산에서 술을 마시며 걷다가 사고라도 난다면 이는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런 음주 문화는 사라지기를 바라고, 동시에 이런 문구가 사라지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ABC를 걷기 위해 약 이틀간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걸을 수 있다. 현지 가이드, 포터, 요리사, 지프차 운전수 등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협조 덕분에 우리는 안전하고 즐겁게 걸을 수 있다. 또한 히말라야 산맥인 안나푸르나를 걷는 경험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시간적 여유, 양호한 건강 상태, 경제적 여유, 그 외의 주변 상황이 허락해 줘야 가능한 일이다. 이런 모든 조건을 갖추고 이곳까지 온 것 자체가 이미 큰 축복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길을 걸으며 그 축복에 감사를 해야 하고, 그에 맞는 언행을 해야 하는 것이 이 길에 대한 예의라고 할 수 있다. 히말라야는 눈으로 덮인 산이라는 뜻이다. 눈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감싸주며 덮어준다. 우리가 길을 걸으며 자신과 주변 사람, 그리고 모든 존재를 포용하는 마음으로 걷는 것이 ABC에 대한 예의이다. 이 길을 걷기 위해 애써주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에 대해 감사 표현을 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조용하게 걸으며,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막걸리는 여기서 구매 가능해요.”라는 부끄러운 문구가 빨리 사라지길 바라며 이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길에 대한 예의를 지켜 줄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