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 전쯤이었던가,
흔하디 흔한 새해 인사가 다르게 다가왔던 날이.
남들은 다 바쁜데 나는 너무 한가했다.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나니 내 손이 거의 필요하지 않았고
집안일도 큰 힘 들이지 않고 그럭저럭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이 어제 같았고,
내일도 오늘처럼 무기력할 것 같은 일상의 연속이었다.
평온해 보이는 하루가 무덤가의 적막처럼 무섭게 느껴지곤 했다.
당시에 내가 나를 바라보던 시선은
‘잉여 인간.’
딱 그것이었다.
힘든 세상에 먹고살만하니까 나오는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까 봐
겉으로 표현도 못하고 속으로만 무너져 내렸다.
우울과 절망을 감춘 채로
무거운 발을 질질 끌며 계속 걷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차를 타고 가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초점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디오에선 여러 음악이 나왔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가 어떤 생각에서였는지 기도를 하게 되었다.
‘헛된 욕심이면 놓아버리고 희망이면 시작하게 해 주세요.’
종교는 없지만
그 순간만큼은 신이라는 존재에게 기대고 싶었나 보다.
나도 꿈을 갖고 싶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설레는 하루를 기대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마음과 다르게 현실은,
소설 속 블랙홀에 빠진 것처럼 희망도 재미도 웃음도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날은 평소에 관심 있었던 어떤 분야에 생각이 다다랐고
그에 관해 기도를 하게 된 것이다.
한숨을 쉬며 여전히 차창 밖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방송 내용이 들렸다.
곧이어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하면 돼.”
방송 진행자의 따뜻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방송에서는 어떤 영화를 소개하며 대사를 말한 것이었고,
짧은 혼잣말 같은 기도 후에 그 말,
‘그냥 하면 돼’라는 부분을 듣게 된 것이다.
이유도 방법도 없지만
그냥 하면 된다는 한마디가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는지 모른다.
조용히 울며 나를 돌아보았다.
아이에게는, 일단 해보라고 “실패도 성공이야.”라고 자주 말하지만
정작 나는 실패가 두려워 시작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힘들다 하면,
그럴 수 있다고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좀 쉬어가도 된다고 하면서도
이제야 조금 한가해진 나에게는 게으르다고 핀잔을 주는 일이 다반사였다.
지난 시간은 그대로 다 의미가 있으니 쓸데없는 일은 없다고 타인을 위로하면서도
내 과거는 자주 후회했고 비난했다.
서러우면서도 기뻤다.
자책과 후회 때문에 마음 졸이고 작아졌던 내 모습이 서러웠고
더 이상은 그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잘못 살고 있을까 봐 불안하고 눈치 보던 모습이 안쓰러웠고
내가 나에게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든든한 내 편이 생긴 느낌이었다.
진행자는 방송 말미에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했다.
얼마 뒤면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연말이 되면 흔한 인사로 주고받는 한마디가 나에겐,
“새해 복 많이 받을 거야.”라고 들렸고 혼자 미소 지었다.
내가 원했던 모습만,
기어코 이기는 모습만 성공한 삶이라고 여겼는데
어떤 것이든 주어지는 삶은 모두 축복이라는 마음이 생겼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평범한 말이,
‘새해에는, 당신의 현재가 이미 축복임을 알아주세요.’
라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복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나였다.
하고 싶은 것이 떠오르면 주저 말고
‘그냥 하면 되는’ 것이다.
새해에 복을 받는 방법이다.
그 후로 모든 새해 인사를 그렇게 들었다.
내 하루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 좋아하게 되었다.
삶에 대한 애착이 생기니 비교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게는 나만의 길이 있고,
그 길이 고유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드레스를 입고 군중의 찬사를 받는 연말연시에,
나는 방바닥 걸레질을 하더라도,
내 길이고 내 인생이라는 생각을 하자 감사하고 소중했다.
별것 없는 삶이 매우 애틋하고 설레기까지 했다.
이 골목을 돌아서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하는 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때의 벅찬 마음과 감동이 많이 흐려졌다.
하지만
그 순간의 다짐만큼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때로는,
익숙했던 불행의 마음으로 돌아가려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에겐 마법의 주문이 있기에
다시 힘을 내고 하루를 기대하는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
새해 첫날이 아니어도 살며시 말해보고 힘을 얻는다.
‘나, 새해 복 많이 받을 거야.’
마음속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 같을 때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무기 같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