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자동차가 아니다.
원래 학문으로서의 공업디자인은 좀 기생충 같은 구석이 있다. 아이폰이 나오기 전 누가 학부에서 풀스크린 모바일 디바이스를 졸업작품으로 냈다면 조형이 어디 갔냐고 무성의하다며 엄청 비판받았을 것이다. 그러다 누가 패러다임을 바꾸면 그 크리틱들은 어느새 그 뒤에 줄을 서 있는다. 만약 작년쯤 누군가 사이버트럭 같은 작업을 목업으로 제출했다면? 안 봐도 유튜브다.
그런데 사실, 이 이면에는 물리적 조형에 관한 프로페셔널리티 자체가 시대적으로 쇠퇴하는 맥락이 있다. 클래식 건물의 그 엄격한 외벽 양식에서 요소들 간의 비례를 통해 그 형식이 갖는 아름다움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던 장인들은 모더니즘의 도래 앞에서 일자리를 잃는 정도를 떠나 전문성 자체를 박해당한다. 그들은 아마 자부심에 있어 모욕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 테슬라 디자인을 맞이한 기성의 자동차 디자이너들은 어떤 기분일까.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더 이상 기존의 ‘멋짐’으로 더는 열어젖힐 새로움이 없어서 모두가 '이상함'을 통해 시공을 열어가는 이 시대적 맥락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이는 어글리 슈즈가 힙한 맥락과 같다. 자동차의 탈 코르셋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사실 예쁜 건 너무 넘쳐서 식상하긴 한데 기존의 예쁨이 너무 고도화된 나머지 이보다 더 예쁘기는 어려운 이상한 상황이 펼쳐지는 요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목을 받고 싶은 욕구가 계속되면 퇴행은 괜찮은 전략으로 둔갑-재탄생된다. 우리는 다방면에서 새로움에서 오는 설렘을 못생김에서 찾는 시대를 살고 있다.
여튼, 조형에 관한 퇴행은 그만큼 다른 것에 대한 관심사가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일례로 2019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는 사람들이 질 낮은 조형의 쇼카 앞에서 앉아 븨알장비를 착용하고서 차량의 인터페이스를 감상했다. 이는 아이들이 바라는 아빠 차가 카니발 풀옵션이지 람보르기니가 아닌 것과 같은 맥락이다. 어차피 진짜는 스크린 속에 있음을 꼬마도 아는데 껍데기가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시간은 다시 조형을 재조명시킨다. 일례로 슈투트가르트 바이젠호프의 1920년대 모던 집합주거단지 중에 오늘날 봐도 감탄이 나오는 건 개중에 비율과 조형요소를 잘 다듬은 일부 건물들 뿐이다. 당대에는 그 자체로 혁신적이었던 나머지, 그것의 못생김이 혁신의 충격 속에 가려져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시간이 지나면 그 못생김은 그대로 드러나버려 흉물로 전락하게 된다. 참고로 르꼬르비제는 특유의 조형미로 인해 시간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았다.
사이버트럭은 기념비적이긴 하지만 그 못생김으로 인해, 특유의 무성의함에 기대는 이 디자인 언어는 이후의 다른 브랜드의 절충안을 통해 균형을 잡아나갈 것이다. 여하튼 새로운 유행이 시작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어쩌면 그래서 기회는 오히려 후발주자들에게 주어져 있다. 병신 같지만 멋있는 지점을 향한 경쟁에서 누군가는 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이 못생김을 열심히 즐기면 된다. 대신, 세기말 정체모를 사이버 패션의 광풍 후에는 이불킥의 흑역사가 뒤따랐음을 유념하자.
자동차 이미지들의 출처: tesla.com/cybertruck
광고 이미지의 출처: 알 수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