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시인이여
토씨 하나
찾아 천지를 돈다
시인이 먹는 밥, 비웃지 마라
병이 나으면
시인도 사라지리라
- 진이정
도서관에서 문자가 왔다. 예약하신 도서 ‘나는 계…’을 2022년 2월 10일까지 대출해주시기 바랍니다.
기억에 없다. ‘나는 계…’로 시작하는 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책을 대출하고 나서야 작년 초에 예약한 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에 대출해 갔던 사람이 일 년여 만에 반납한 것이었다.
그 사람은 이 책을 대출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던 것일까? 아닐 것이다. 다 하지 못한 필사에, 쉽게 끝내지 못하는 필사에 마음이 저려온 것은 아닐까? 괜한 상상을 하는 이유는 이 책이 가진 사연이 많아서다.
그렇게 나는 진이정을 만났다.
진이정의 “나는 계집 호리는 주문을 연마했다”를 펼친다.
‘요절.’
진이정을 대표하는 단어다. 그의 시가 모두 모여 발행된 것은 그의 사후 17년 만이다. 다시, 12년이 흘러 내 손에 그의 책이 놓였다. 아마도 그동안 그는 억겁의 시간을 흘려보냈겠지.
처음 진이정이란 시인을 알게 된 것은 황현산 님의 수필에서였다.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란 시 한 편을 읽고 진이정이 궁금해졌다. 인터넷 서점을 찾아보니 책은 모두 절판이었다. 다행히 중고도서가 유통되고 있었다. 그런데 가격이 요샛말로 ‘사악’했다. 초판은 14만 원, 나머지도 8만 원을 호가하고 있었다. 도서관을 검색했다. 시내 도서관 8곳 중 딱 한 곳. 한 권만이 있었다. 그마저도 대출 중이었다. 그렇게 책을 예약했던 것이 작년 봄이었다.
잊고 있었던 책이었는데 어느 날 툭 하고 나타난 옛날 친구 같았다. 다시 볼 수 없을 거라고 가슴 뒤편으로 밀어두었던 가족을 만난 것 같다면 지나친 이야길까?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가슴이 시려서 책을 펼치지 못했다.
나도 이 책을 빌리고 빌려 보겠구나.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필사. 이주일 동안 모두 옮겨 적고 반납해야지 마음먹었다. 그런데 한 편을 옮겨 놓고 나서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계속 첫 장의 시가 가슴을 떠돈다.
“시인이여/ 토씨 하나/ 찾아 천지를 돈다”
진이정의 시에는 마침표가 없다. 쉼표만 드문드문 뒤를 돌아본다.
시아버님 산소를 정리해서 납골당에 모셨다. 처음 가 보는 납골당의 분위기는 내 엄두로는 너무 무거웠다. 공기조차 대리석 바닥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죽음’이 모여 다른 세상을 만들다니.
아직 삶에 욕심이 많은가? 죽음이 나를 모른 척해주기를 바랐다.
이 세상은 그저 남의 세상이길….
참 못됐다 하면서 바라고 바랐다.
뚜벅뚜벅 대리석 기둥 사이를 돌다가 아,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사람처럼 고개를 돌렸다. 작은 문 앞에 붙어 있는 가족사진 한 장. 스치듯 보았지만 알 수 있었다.
너무 빠르구나.
두세 살이나 되었을까 어린 아들을 안고 환하게 웃고 있는 어린 부부. 더 이상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중의 누구라도 너무 빨랐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면 값싼 호기심 따위는 접어야 한다. 이번엔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다.
진이정은 93년 11월, 34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돌던 그의 시는 시집으로 묶였고 2022년 내 손에 놓여 있다.
책 제목은 '발칙하다.'
“나는 계집 호리는 주문을 연마하며 보냈다.”
아직 이 문구가 담긴 시를 만나지는 못했다. 쉽게 스쳐가지 못하도록 진이정이 자꾸 내 마음을 붙잡기 때문이다.
종이 한 장의 무게가 삶보다 무겁다. 마침표를 찍지 못한 그의 시를 미련스럽게 돌아보고 돌아본다.
* 참고도서 "나는 계집 호리는 주문을 연마하며 보냈다"
진이정 지음. 이승하, 우대식 편. 새미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