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 홍매

붉은 숨

by 소려


선암사 홍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에 오래전 약속이 생각난 듯 서둘러 선암사로 향했다. 봄 가뭄에도 굽이굽이 계곡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매화 소식은 선암사 야생차 체험관에서 먼저 들었다. 찻상에 놓인 청매화 가지 하나가 수줍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녹차를 준비해주시던 체험사분이 선암사 홍매는 아직 피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 다음 주에 또 오자, 남편과 새로운 약속 하나를 만들며 오히려 마음이 들뜨는 이유는 선암사에서 20분 거리에 사는 객기일 것이다. 일 년에 한 번, 먼 길을 내려온다면 날짜를 잘 맞춰야 만날 수 있는 선암사 홍매였다. 더 이상 나이를 세는 것이 무의미한 선암사 홍매는 세월의 의미를 가지를 뻗어 일러주고 있었다.


홍매화, 나는 개인적으로 꽃잎까지 붉은 홍매화보다 꽃몽우리는 붉지만 꽃을 터뜨리면 하얀 잎새가 펼쳐지는 홍매화를 좋아한다. 남녘에 내려와 매실 산지에 살다 보니 이곳 사람들은 그런 홍매를 남고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고는 청매보다 꽃이 늦게 핀다. 열매는 살짝 누런 빛을 띠는데 매실 장아찌를 담으면 식감이 아삭한 청매와 달리 쫀득하다.


붉은 꽃몽우리에서 터져 오른 하얀 속살을 본 순간 홍매에 빠져들었다. 집 남쪽 창가에 홍매 한그루를 심었다. 푸른 하늘로 뻗은 가지에 붉은 꽃몽우리들이 차오를 때면 세월이 흐르는 것이 서럽지 않다.




어린 매화들은 사람들의 성급한 마음에 쫓겨 마른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짧지만 청매와 홍매가 번갈아 피어오른 선암사 매화길에는 분분히 매화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 마스크 사이로 꽃향기를 담았다.


그러다가 타들어 가듯 검게 비틀린 홍매 한그루를 보았다. 불에 그을린 것일까? 깊은 화상을 입은 것처럼 끈적한 진액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주위 나무들은 멀쩡한 것을 보면 병충해를 입은 것도 같았다.

“아, 흉해.”

고개를 돌렸다. 내 몸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튼튼하게 솟아오른 나무들 사이에서 검은 뼈를 드러낸 나무는 더 흉해 보였다. 그러다 가지 끝에 매달린 붉은 꽃망울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 힘든 몸으로도 나무는 다시 꽃을 피우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여느 집 마당이었다면, 어느 거리의 가로수였다면 이미 잘려나갔을 나무였다. 선암사 스님들은 그런 나무에도 차마 칼을 대지 못했나 보다.


집에 돌아오는 길, 남편과 생맥주 한 잔을 기울였다. 보지 않으려 애썼던 그 나무는 오히려 가슴에 남아 어른거렸다.

“그 나무는 차라리 잘려나가길 바라지 않을까?”

내 말에 남편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무는 꽃을 피우며 제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함부로 자른다는 건 인간의 생각이겠지.”

글쎄, 둘 다 정답은 아닐 것이다.


흉하다, 용하다 소리를 번갈아 들으며 그 나무는 어떤 시간을 보내왔을까? 인간의 말 따위는, 인간의 시간 따위는 상관없겠지. 그 홍매는 봄기운에 붉은 숨을 한 번이라도 더 토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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