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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려 Oct 05. 2024

행복한 기억

제4부 1장 1958년 모스크바

  "알아."

  선호가 말했다. 선호의 얼굴은 어두웠지만 선호의 눈길은 레닌 언덕에서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따뜻했다.

  “모스크바에서 마스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야, 아마 소련 사람들 대부분이 알고 있을 걸. 그리고 네가 마스터의 양녀라는 건 모스크바 대학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을 거야.”

  선호는 마스터에 대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선희에게 말해주었다.

  마스터는 러시아 혁명 때 귀족이었던 자신의 양부모를 팔아 지금의 정치적 발판을 마련했다고 했다. 망명하려는 수많은 귀족들을 잡아냈고 볼셰비키들을 교묘히 이용해 자신의 잇속을 채우고 복수를 한다고 했다. 

  “그 사람에게 소중한 게 있을까? 다른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도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이라고들 하더군. 힘없는 사람들을 없앨 때는 자기 손을 쓰지도 않는대.”

  마스터의 눈빛 하나에 사람들은 알아서 칼을 들었다고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마스터의 권력을 등에 업고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스터가 적을 제거하는 방법은 잔인하기로 소문이 자자했지만 아무도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했다. 그저 마스터 눈 밖에 난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살을 한다고도 했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고도 했다. 

  “그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을 쓸모없고 추한 존재라고 느끼게 하는 것 같아.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버리고는 철저히 고립시킨대. 그리고는 그 사람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즐긴다고 하더군.”

  “그럼 나도?”

  선희가 몸을 떨었다. 선호가 일어나 선희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아니, 너는 아닌 거 같아. 다른 의도가, 네게서 얻고 싶은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거 같아. 그래서 사람들이 너를 더 무서워하는 것 같아. 마스터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고.”

  선호가 선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선희의 눈가에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람들이 너를 외면하는 건 마스터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방법일 거야, 물론 그 사람들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칼을 들지 않고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지도 몰라.” 

  선희는 눈을 내리깔고 어쩔 줄 몰라하던 바즈데예프 교수가 생각났다. 다가올 듯 망설이다가 돌아서던 세르게이와 다른 학생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선희만큼 무섭고 외로웠을 레닌그라드 기숙학교의 나탈리가 생각났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네가 지금 사람들한테 외면당하는 건….”

  선호가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선희야, 네 탓이 아냐.”

  선희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선호를 보며 웃었다. 선호가 환하고 아프게 웃었다.

  “이제 그만 갈까?”

  선호가 선희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선희가 따라 일어서자 선희 손에 들려 있던 해바라기가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다 시들어버렸네.”

  선호의 표정이 쓸쓸해졌다.

  “아니, 시들지 않았어.”

  선희가 진심을 담아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영원히 시들지 않아. 내 가슴속에서….”

  선희의 말에 선호가 웃으며 선희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야, 너~.”

  선희가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선호를 보며 말했다.

  “야? 너? 너 계속 반말할 거야? 내가 너보다 여섯 살은 많거든. 조선어에는 분명히 존댓말이 있어요.”

  선호가 장난스럽게 목청을 높였다.

  “그러게. 오라버니.”

  선희의 대답에 터진 둘의 웃음소리가 건물 벽을 타고 울렸다. 선희는 바랐다. 이 웃음소리가, 이 시간이 여기 이 돌바닥에, 건물 벽에 깊이깊이 새겨졌으면 좋겠다고. 언제든 돌아오면 이 웃음소리를 다시 듣고 이 시간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바라기 꽃말이 뭔지 알아?”

  부활의 문을 지나며 선호가 물었다.

  “몰라, 뭔데?”

  “숙제.”

  선호가 선희의 눈을 피하며 웃었다. 선희는 뭔지는 몰라도 해바라기의 꽃말은 참 좋은 말일 것 같았다.

  “우리 여기에 행복한 기억만 가득 새겨놓자.”

  선호의 말에 선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희는 선호의 우리라는 말이 좋았다. ‘선호와 함께’라는 것.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테아트랄나야 광장으로 접어들었다. 가로등이 일제히 켜졌다. 건물들이 은은한 불빛을 받아 노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건물들이 한껏 단장을 하고 길을 나선 것 같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어둠이 건물들 손을 붙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길 건너편으로 자신만의 조명을 받아 더욱 화려하게 빛나고 있는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멋지고 곱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그 건물 안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선희와 선호는 한동안 그 앞에 서서 팔짱을 끼고 나오는 연인들을 지켜봤다. 모두들 아름답고 행복해 보였다. 선희가 선호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다음에는….”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동시에 말했다.

  “볼쇼이 극장.”

  선희와 선호가 환하게 웃었다. 누군가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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