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2장 1958년 모스크바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선희 뒤로 선호가 살금살금 다가와 ‘왁’하고 선희를 놀래 켰다. 새롭지도 않은 듯 선희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고 혼자 신난 선호가 선희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호기롭게 가슴에서 표 두 장을 꺼내 선희에게 건넸다.
“볼쇼이? 정말 구했네.”
표를 받아 든 선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호를 향해 돌아앉았다.
“힘 좀 썼지.”
선호가 어깨를 으쓱하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표에는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라고 적혀있었다. 선희는 좋아서 선호와 표를 번갈아 보다가 표를 가슴에 끌어 앉았다.
“이따 수업 끝나고 보자.”
가만히 선희를 바라보던 선호가 벌떡 일어서더니 돌아서 갔다. 선희가 뒤돌아보았을 때 선호는 이미 건물 뒤로 사라지고 없었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상쾌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선희를 쳐다보다가 선희를 알아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선희는 쉬는 시간을 이용해 기숙사에 다녀왔다. 지난해 여름, 학교 바자회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산 옷을 꺼내 입었다. 붉은빛이 살짝 도는 긴치마에 흰 블라우스를 곱게 차려입은 선희는 건물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감출 수 없는 웃음이 민망해져서 주위를 돌아봤다. 선희를 힐끔거리던 사람들이 시선을 거뒀다. 얼굴에 마음껏 웃음을 띤 선희는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 주위가 어두워지고 혼자 밝게 빛나는 것 같았다.
김 은영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본관으로 들어서자 복도 저 편에 서 있던 은영이 걸어왔다. 3, 4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선희는 은영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찬란한 빛.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자신감과 여유가 은영에게서 퍼져 나오고 있었다.
은영이 선희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것일까? 천천히, 하지만 또박또박 은영이 선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선희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다가왔다. 열 걸음 정도 마주하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은영의 눈길에 선희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선호가 왔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은영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은영은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디며 선희 앞에 섰다.
수업이 막 끝났고 수업이 또 시작되어야 하는 중간 시간, 복도는 학생들과 교수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했다. 그 복도에서 은영이 선희 앞에 섰다. 있는 그대로 누군가의 시선을 모으는 사람이. 있는 그대로 모두가 시선을 피하는 사람 앞에. 어떤 두려움도 동요도 없이 서 있었다.
은영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선희는 다시 한번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맑고 깊은 검은 눈동자, 검은색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은영의 저 깊은 내면에서 반짝이고 있는 또 다른 빛에 선희는 눈이 부셨다. 그러다가 뭉클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갖고 싶다. 이 눈빛, 이 얼굴, 이 숨결…. 이 사람의 모든 걸 갖고 싶다. 내 손안에 쥐고 싶다.’
욕망이란 것이 출렁거렸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가지지 못하는 것을 아무 수고도 들이지 않고 누리는 사람.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있는 그대로 인정받는 사람.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은영은 알고 있을까? 은영은 그것들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갖고 싶다는 마음 뒤에서 다시 무언가가 삐죽 고개를 내밀더니 선희를 쳐다보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부스러뜨리고 싶다.’
선희는 검게 솟아올라 뭉글뭉글 퍼져나가는 자신의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그 생각이 은영에게 읽힐까 봐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선희를 쳐다보던 은영이 선희의 귀에 입을 갖다 대고 말했다.
“선호에게서 떨어지라, 안 그러면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어.”
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고개를 들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또각또각 멀어지는 은영의 발소리가 선희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대로 세상이 멈췄다. 선희는 그곳에 갇혔고 은영은 선희의 문에 못질을 하고 있었다. 은영이 선희 주위의 희미한 빛마저 쓸어가 버렸다. 강의가 시작되었다. 강의실 문들이 쿵쿵 닫혔고 선희만이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복도의 중간에 서 있었다. 건물 밖으로 나가는 문이 아득히 멀어져 갔다.
‘질투, 그래 질투하는 거야.’
선희는 모든 생각을 지우고 질투라는 단어만을 떠올렸다. 선호가 빛이 아닌 어둠을 바라본다고 질투하는 거야. 자신에게서 선호라는 한 줄기 빛조차 채가려는 은영이 미웠다. 모든 것을 다 가졌으면서…. 그래, 선호가 너무 큰 빛인 거야. 그래서 너무 탐나는 거야. 그래, 그래서 질투하는 거야.
문을 더듬었다. ‘출구를 찾아야 해. 더 이상 어둠 속에서 혼자 울고 싶지 않아.’ 선희는 힘겹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휘감아 끈적끈적하게 들러붙는 검은 손들을 힘들게 떼어냈다. 그리고 조금씩 빨라지는 발에 몸을 맡겼다. 선희의 발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복도를 가득 채웠다.
어두운 건물에서 토해지듯 밖으로 뛰쳐나왔다. 선호가 그 나무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선희는 그대로 달려가 선호의 품에 안겼다. 놀란 선호가 선희를 잠시 쳐다보다가 쓸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선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만가만히. 하얀 꽃들이 바람에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