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2호선
현정은 원장을 기다리며, 의자에 앉아 노트와 펜을 꺼내 생각나는 것을 적는다.
그녀는 오랜만에 돌아온 곳이라 생각나는 소재가 많은지, 아니면 마음이 한가하게 느껴져서 그런지,
최근 3개월 동안은 꽤 많은 글을 긁적이고 있다.
노트에 그때마다 원하는 색의 펜을 고르는 재미,
종이에 꾹꾹 눌린 펜 자국,
지우고 다시 쓰기가 용이하지 않아, 꽤 신중하게 쓰게 되는 단어 하나하나,
그 사람만의 고유한 글씨체,
’sns’에 사진과 함께 짧은 글을 기재하는 것과는 다른 감성이 있다.
[나의 어린 시절의 구로역은 서울 외곽의 어느 한적한 마을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어느 지점을 넘는 순간, 같은 서울 안이지만, 멀리 다른 고장에 온 것 같은 그런 기분?
오늘 온 구로역은 그때 구로역이 맞나 할 정도로 많이 변했고, 주변 또한 태어나서 처음 와 본 동네 마냥, 예전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오늘은 어느 지점을 넘어, 새로운 문명의 세계에 들어온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작은 키에 마르고, 단발머리에 안경을 쓴 여자가 방으로 들어온다.
전화 통화 할 때, 앳된 목소리 여서, 원장 치고는 젊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만나 보니, 앳된 목소리 대로, 나이가 많아야 30대 초반 정도로 젊어 보인다.
현정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며 말한다.
“아닙니다. 제가 좀 일찍 왔어요.”
“뭐 좀 드시겠어요?”
“괜찮습니다.”
원장은 자리에 앉으며 묻는다. “라이언 선생님 하고 친하셨어요?”
Ryan Clark
그는 유능한 컴퓨터 프로그래머였고, 미국에서 현정과 같은 부서에서 일한 직장 동료였다.
현정이 회사를 그만두고, 얼마 후, 그도 아시아를 너무 사랑한다며, 사표를 내고 아시아로 떠났다고 한다
그가 어느 아시아로 떠났는지, 그때, 현정은 알지 못했다.
나중에 연락이 된 그는, 아시아 여러 곳을 여행 다녔고, 일본 거리의 매력에 빠져 그곳에서는 다른 곳 보다 좀 더 있었고,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미국에 돌아오려는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에 도착 한 순간, 그는 공기, 냄새, 사람들,
모든 것이 그 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구나
라고 느꼈다고 한다.
원래 미국에서도 한국 음식을 좋아했던 그였다.
그는 한국은 여행자, 방문자가 아닌, 한국 사람들과, 한국 문화, 음식을 깊이 공유하고 느끼며 좀 더 오래 머물고 싶어 졌고, 그래서 일자리를 알아보다, 미국인 영어 강사를 채용한다는 것을 알고는, 영어 강사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의 실력 정도면, 한국의 ‘IT’ 회사에서 일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컴퓨터와 컴퓨터 회사에도 좀 지쳐서 떠난 때라, 새롭게 떠난 곳에서 새로운 일을 하며, 시간적으로, 마음적으로 여유롭게 보내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한국계 미국인 2세, 그의 표현에 의하면 정말 운명처럼 만난 여인과 결혼하여,
최근에 아이 아빠도 됐다고 한다.
와우.
짧은 세월, 혹은 긴 세월 속에 인간의 삶은 참으로 다채롭게 펼쳐지는 것 같다.
라이언은 한국에 계속 살고 싶지만, 그의 부인은 미국에 가서 살기를 원하고, 또 아이를 키우는 건, 둘 다 미국의 문화와 교육 환경이 익숙해, 가족이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면서, 미국에 에 있는 ‘IT’ 회사에 대해 알아보다, 전 직장 동료였던 현정에게도 연락을 하게 된 것이다.
참 좁은 세상이라 느껴지는
우연이다.
현정은 한국에 있고, 라이언은 그가 하던 일을 대신할 강사도 구하고 있던 참이라, 현정을 이 학원에 소개한 것이다.
둘은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한국에서 만나지는 못했지만 라이언은 떠나면서,
학원 근처의 맛집,
서울의 맛집,
지방의 맛집들의 리스트를 현정의 이 메일로 보내면서,
“Enjoy in Korea.”
라고 덧붙였다.
금발머리에, 백인 미국인이,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에게 한국의 맛집 리스트를 보내주며,
즐기라니.
미국에서도 라이언은 한국 식당을 기가 막히게도 잘 찾아내, 현정과 같이 가자고 하기도 했었다.
라이언은 한국인의 정서와 입맛을 담은 미국인.
그렇게 표현해도 될 것이다.
“네. 같은 회사 다닐 때 친하게 지냈어요. 저도 라이언 소식을 오랜만에 듣고 놀랐어요.”
“참, 유쾌하고, 재미난 분이셨어요. 학생들도 좋아했고요. 영어로 말하는 한국인 같은 느낌이랄까요.”
현정은 원장의 표현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저희 학원이 100 퍼센트 영어만 쓰는데, 가끔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어, 영어 둘 다 잘하시는 분이 계시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네.”
“네?”
현정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네”라고 한 것인데,
원장이 “네?”라고 반문하자 둘은 서로 의아하게 쳐다본다.
원장은 과도한 손짓과 웃음소리를 내며 말을 잇는다.
“아. 네. 네. 네. 그러니까요. 우리 현정 선생님은 한국어도 영어도 다 잘하실 거 같아요. 그리고 이곳에 주변 IT회사 직원 분들이 많이 오세요. 아무래도 또 그쪽 회사에서도 일하신 경험이 있으시니, 여러모로, 저희 학원에 맞는 분이 오신 것 같네요.”
원장은 다시 고음의 웃음소리를 낸다.
현정은 일을 안 한다고 할까
라며 살짝 고민에 빠진다.
원장의 웃음포인트를 공감해주지 못할 것 같고,
그녀가 지나치게 감정적인 것처럼 보여,
피곤한 타입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희는.”
원장이 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저희는 한 소속이지만, 일은 상당히 개인 적으로 하는 것을 추구해요. 교재도, 강의 내용도 알아서 하시면 돼요. 즉, 저는 이곳 공간만 제공할 뿐이고, 활용은 선생님 재량 대로 하시는데, 각 선생님들은 한 달에 한번 저와 개별적인 회의를 통해, 서로 피드백하는 시간을 가져요. 강의 내용과 스케줄도 한 달에 한번, 데스크 직원에게 제출하시면, 다른 선생님들 것까지 함께 , 조율해서 완성된 스케줄표를 드릴 거예요. 강의 시간은 오전 5시에 시작해서, 마지막 저녁 반이 8시이니까, 9시에서 9시 반쯤 끝난다고 생각하시면 되고요. 강의를 하시는 시간은 하루에 최소 4시간, 강의 준비하시는 시간 2 시간 해서, 하루 6시간, 주 4일은 강의를 하셔야, 기본 급여가 지불되고, 학생 수에 따라 인텐시브 드리고요. 외국 선생님들은 근처 아파트를 제공하고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자택에서 출퇴근하실 거라고 하셨죠?”
현정은 원장이 말끝에,
‘~요’를 붙이면서,
마치 리듬을 타듯이 긴 문장을 빠르게 말하는 것을 듣다 보니 정신이 멍해졌다.
현정이 아무 대답 없이 있자 원장은 안경너머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현정은 정신을 차리고 대답한다.
“네.”
“그러면 한 달에, 교통비도 지원해 드리니, 버스, 지하철, 자가이용 등 편하게 하시면 되고요. 빌딩 지하에 주차장이 있는데, 여기 회사와 같이 써요. 주차가 필요하시면, 미리 신청하시고, 주차비도 직원 할인 해 드리는데, 주차 자리가 넉넉하지는 않아요.”
“네. 저는 지하철 타고 다니려고 해요.”
원장에게 옮았나?
현정도 말끝을 ‘~~ 요’로 끝맺는다.
“네. 그럼 그렇게 하시면 되고요. 더 궁금하신 점 있을까요?”
현정은 원장이, 감정적이고 피곤한 타입이라 생각했는데,
일하는 데 있어서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심플하면서 정확해
일을 같이 하기에는 또 괜찮은 타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라이언이 설명을 해주기는 했는데, 원장님 하신 말씀과 비슷한 것 같아요. 제가 라이언이 가르치던 것과 비슷하게 하면 될까요?”
또 말끝에 ‘~요’를 붙였다.
원래 이렇게 말하는 거였나?
라고 현정은 생각한다.
“네. 라이언 선생님은, 주로 프리토킹을 가르치셨어요. 선생님께서 이디옴도 해주시고,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대화가 좋다고 필요하면 한국어로도 설명해 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이곳에 오는 학생분들은, 주로 실전 영어를 많이 배우고 사용하기를 원하시거든요. 미국 회사로 파견을 가거나, 취업을 원하는 분들이 많이 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제가 일 하면서, 궁금한 점이 있다면 그때 또 물어보겠습니다.”
그렇지 말끝에 ‘~다’로 끝나는 게 맞지? 맞나?
라고 현정은 또 생각한다.
“네.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하시고요. 오늘이.”
원장은 의자 앞 테이블에 크게 붙여진 달력을 보면서 말을 잇는다.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다음 주 수요일까지, 강의 내용 계획서와 함께, 원하시는 강의 시간을 알려주시면 되겠네요. 수업은 그 다음 주부터 시작하면 어떨까요?”
“네. 좋습니다.”
“그러면, 제니퍼가. 제니퍼는 데스크 직원이에요. 선생님을 여기로 안내해 드렸을 거예요.”
“네. 인사도 나누었습니다.”
“제니퍼가 선생님들 어시스트라 생각하시면 돼요. 필요하신 것들과 스케줄을 도와줄 거예요. 제니퍼가 빈 강의 시간표 드릴 테니, 그거 참조하셔서 강의 시간을 짜보시구요. 교재나 수업에 관련된 것들 사셨으면 물품 신청서 드릴 테니 거기에 적어서, 그것도 제너퍼에게 영수증이랑 청구하시면 되고요. 전반적으로 수업에 필요한 것들은 제니퍼에게 말씀하시고, 또 저에게 말씀하셔도 되고요.”
“네. 알겠습니다. “
“그러면, 다음 주 수요일에 뵐까요?”
“네.”
현정은 원장의 회의 속도와 일처리,
그리고 리듬 있게 말하는 끝말의 ‘~요’에 놀라울 뿐이다.
원장은 한국에서 지방대 수학과를 졸업해, 지방 고등학교에서 수학 선생님이었다.
원장은 어느 날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지루 해졌다.
매년 업데이트되기는 하지만, 비슷한 교과 과정.
하기야, 고등학교 때 배워야 하는 수학 과정이 있으니, 크게 달라질 이유도 없지.
고정된 업무시간.
즉 몇 시에 학교에 출근해, 몇 시까지 수업을 하는 매일 반복되는, 그런 일상적이고 규칙적인 생활이 지루해졌다.
원장은 구체적인 계획도 방향도 없지만, 그냥, 뭐든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고정된 급여를 포기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고정된 수입은 드림이지 않는가.
하지만, 그녀는 돈도 좀 더 많이 벌고 싶었다.
그녀는 휴직계를 내고 여동생이 사는 캐나다에 방문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복직 대신,
사표를 내고,
영어 학원을 차렸다.
그녀의 조사 결과, 취업, 대학원 진학, 외국으로의 파견 혹은 외국 회사 취업을 위해,
여전히 많은 어른들은 영어 공부를 하고 있고,
시험 위주의 영어 학원은 많지만, 스피킹 위주의 학원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스피킹 위주의 프리 토킹 반과, 스피킹과 리스닝 시험 준비반의
영어 학원을 개원했다.
학원은 생각보다 잘 됐고, 그녀는 고정 수입은 없지만, 고정 수입보다 꽤 많이 돈을 벌고 있고,
5명의 한국인 토익, 토플 선생님과
10명 정도의 외국인 선생님,
그리고, 오피스 직원들까지 해서,
20명 정도 되는 직원이 있다.
원장은 학원을 운여 하는 것도 재미있고, 돈을 버는 것도 즐겁다.
수업을 관여하지는 않지만,
선생님이었다는 경험과 경력으로, 선생님들의 수업 자료나, 커리큘럼을 도와주기도 한다.
물론 원하는 선생님들 한 테만.
그녀는 자유로운 업무 환경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라이언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죠? 한 달에 한번 학생들한테 수업 평 가서를 받는다는 거요?”
“네. 들었습니다. 학생들은 어떻게 모집하세요?”
현정은 혹시 원장이 광 고지라도 주변에 돌리라고 할까 하여 묻는다.
“저희 학원 홈페이지에 올리고, ‘sns’ 에도 광고 들어가고요. 근처 회사들과 협력해서, 회사에 공고를 띄어 달라고 하기도 하고요. 대외 영업팀에서 따로 하고 있어요.”
현정은 순간 자신도 미국 IT회사에서 일한 꽤, 첨단적이고, 테크놀로지 한 사람인데,
광고지라는 아날로그 한 생각을 했다는 것이 창피하다.
“아. 네. 그렇군요.”
“다음 주에 사진도 찍으시고, 홍보용 영상도 만들 예정이니, 짧게 자기소개 정도 생각해 오시면 좋겠어요. 홈페이지 보시면서, 다른 분들 하신 거 보고 참고하셔도 되고요. 수요일에 회의를 하니까, 목요일쯤 하시겠네요.”
“네. 알겠습니다.”
학원 위치는 집에서 지하철을 타고 다니기도 나쁘지 않고,
‘team-play’ 없이 개인적으로 일 하면 되고,
‘Boss’ 도 일 하는 면에서는 깔끔하고 똑 부러진 것 같다.
게다가 한 달에 한 번만 만나면 되지 않는가.
일 하는 시간에 비해서, 보수도 적당하고,
일 하는 시간도 정해져 있지만,
자유롭게 스케줄을 짜면 돼서, 시간적 여유도 있을 것 같다.
평 가서나 학생수를 신경 써야 하긴 하지만, 홍보팀이 따로 있다고 하니, 그렇게 부담이 되지 않는다.
라이언을 대신해, 다른 선생님 구할 때까지 잠깐 할 일이지만,
그래도 그동안이라도 일 하기에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 생각한다.
원장은 빠진 공지 사항이 없는지 잠시 생각하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한다.
“그럼, 오늘 이야기는 다 마친 거 같고요. 혹시 중간에 궁금하신 거 있으시면, 전화하세요.”
현정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한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원장은 현정을 방문까지 배웅하고 인사를 한다.
학원은, 전체적으로 모던하고, 깔끔하며, 교실마다, 큰 스크린과, 한쪽에는 투명한 칠판이 놓여서,
마치 ‘IT’ 회사나, ‘AI’ 회사 전략 회의실처럼 보인다.
게다가 학원에 대외 마케팅팀, 영상팀, 회계팀이 따로 있다니,
현정은 오히려 대학 전공을 살려, 마케팅팀에서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지금은, 현재의 서울 문화부터 다시 배워야 할 것 같다.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어
라고 현정은 생각한다.
제니퍼에게 필요한 서류들을 받은 후, 학원 밖으로 나오니 5시쯤 되었다.
왠지 고등학교 때 학원문을 열고 나오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현정은 학원 친구들과 함께 다녔던, 학원 앞 오락실을 떠올리다, 이내, 상당히 문명화된 복잡한 신세계에서 나와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서둘러 지하철 역으로 향한다.
타는 사람들 분위기는 좀 변했지만 17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노선의 지하철을,
왔던 방향 말고 반대 방향으로 탄다.
2호선은 순환선이라 이 방향으로 타던 저 방향으로 타던 집이 있는 역으로 간다.
현정은 한강 다리를 건너며 창밖을 바라보고 싶어졌다.
한강 위 지하철을 달리며, 노을을 보던 추억을 떠올리며.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노트 대신 핸드폰 메모에 적는다.
[변 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2호선 지하철인 것 같다.
지하철 역을 내려, 밖으로 나가는 세상은 변했지만,
내가 학창 시절에 탔었던,
2호선 지하철에 담긴,
느낌과, 분위기는 그대로 인 듯.]
현정은 순간 배가 고프다는 걸 느끼고, 지나는 역을 보면서,
여기서 내려서 뭘 먹을까?
아니야 저 역에서 내려서 뭘 먹고 들어 갈까?
생각하다가, 인터넷으로 집 근처에 있는 통닭집을 찾아낸다.
후라이드 치킨에 생맥주.
예전에 먹던 그 느낌으로다가.
미국에서도 닭요리를 많이 먹었지만,
한국의 겉 튀김은 바삭하고, 안은 촉촉한 질감의, 고소한 튀김 맛이 나진 않았다.
“네. 엄마.”
현정의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 온다.
“원장님은 잘 만났어?”
현정은 37살에, 5살이 된, 아이의 엄마지만, 현정의 엄마, 지숙에게 그녀는,
늘 어린 자식처럼 마음이 쓰이고 걱정이 된다.
대부분의 한국 엄마들이 그러하겠지만,
지숙은 일찍 먼저 남편을 보냈고,
자식도 현정 하나라 더 그러는지도 모른다.
문 재철.
지숙의 남편 이자 현정의 아버지, 재철은, 삼성동에서 무역업을 하던 회사 사장이었다.
재철은 사업을 꽤 잘하던 사람이었고, 그의 회사는 1997년 때 IMF도 잘 버텼었다.
그런데, 2003년 그의 나이 겨우 46살, 현정이 고작 17살 때,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의 회사 사무실에서 쓰러졌고,
회사 부사장으로 있는 지숙의 둘째 오빠에 의해 발견돼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흔히 말하는 골든 타임을 놓쳐,
몇 시간 후 사망 했다.
재철은 뇌졸중 전조 증상 같은 것이 있었지만, 뇌졸중 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평소, 술이나 담배를 하지 않았고, 운동도 꾸준히 하고, 음식도 건강하게 먹는 편이어서 건강에 자신 있던 사람이었다.
최근 두통이 심하고, 어지러운 증상이 있었으며 시야가 흐릿하게 보일 때가 있어, 병원 검진 예약을 잡아 놓은 상태였고, 재철은 이전보다 좀 더 많이 쉬면서, 몸 관리를 하고 있기도 했었다.
그날도 회사에 늦게 출근했고, 몸 컨디션은 평상시와 다르지 않았다.
현정도 그때, 고등학생이라 대학 입시 준비로 한창 바쁠 때였고,
지숙도, 고등학생인 현정을 챙기고 지숙의 노모도 돌봐야 하는 때였다.
재철은 그날 그렇게 갑자기,
현정과 지숙을 떠났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날.
준비도 없이.
인사도 없이.
재철 보다 먼저 나가는 현정은,
“아빠 다녀오겠습니다.” 가 그에게 하는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현정은 그 뒤로, 그날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아빠의 얼굴이 평소와 다른지,
그가 아파 보이진 않았는지,
살펴봤어야 했다며 후회하고 자책했다.
지숙은, 늘 부지런하던 재철이 요즘 늦게 일어나고 일도 늦장을 부리며, 안 먹던 두통약을 다 먹고 눈이 좀 침침 하다며 안약이 어디 있냐며 찾았지만,
사업 시작하고 하루도 쉬지 않고 쉼 없이 달려왔으니, 이제 좀 천천히 하려나 보다고만 생각했다.
지숙은, 재철이 나가는 것을 보고 서둘러 집을 나와 노모의 집으로 갔다.
노모의 집에 일이 있어 간 건 아니었다.
평소대로 그녀를 챙겨 주러 간 것이고,
게다가 그날은, 큰 오빠 내외가 온 다고 하길래, 조금 더 서둘러서 간 것뿐이다.
큰 오빠네도 온다고 했으니, 그들이 노모를 돌 봤을 것이다.
그리고, 노모의 집에 가는 대신 재철과 함께 집에 있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 골든 타임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재철이 떠나고,
지숙은,
유심히 봤어야 돼.
뇌졸중 전조 증상이, 말이 어눌해지거나 걷는 게 이상하다고 하던데,
그에게 그런 증상이 있었는지 유심히 봤었야 해.
그날, 늦었는데, 출근하지 말라고 말렸어야 해.
집에 같이 있었어야 해.
라고 매일매일 그때 그 시간으로 돼 돌릴 수만 있다면 하면서,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후회 뒤에는,
돼 돌릴 수 없는 시간이라,
그녀의 살과 피가 말라가는 고통이 밀려왔다.
고통은 자책과 비난이 더해져 말라가는 그녀를 아프게 찔러댔지만,
지숙은 이 고통이 그때 홀로 죽어 가던 재철이 겪은 고통보다는 덜 할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현정은 재철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 버리려, 공부에 더 집중했지만,
아빠도 없는데,
아빠도 없는데,
뭘 위해서,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녀를 깊은 심연의 고통으로 데려가
내가 살 수 있을까?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게 했다.
그렇게, 두 모녀는 재철의 건강 상태를 살펴보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 렸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과 절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으며,
그가 떠난 그 시간 이후로,
지금까지 현정과 지숙에게는 고통스러운 그리움이다.
현정은 지숙이 있기 때문에 지숙을 위해서라도,
그 어린 나이에,
살아 야지
라고 생각했다.
그녀마저 슬픔의 나락으로 빠져 힘들게 살아간다면,
지숙도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지숙 앞에서 슬픔을 애써 참고 드러내지 않았다.
현정은 대학 1학년을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지숙만 한국에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아주 잠시라도 좀 멀리 떠나 있고 싶었다.
떠나면, 참고 있는 슬픔을 맘껏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떠나면, 그리움이 좀 덜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잠시 떠나러 갔던 미국에서,
17년을 살고,
또 다른 고통과 아픔을 가지고 돌아왔다.
엄마가 있는 곳,
고향.
“네. 다음 주까지 준비하고, 그 다음 주 월요일부터 일하기로 했어요.”
“언제 와? 내일 내려올 거야?”
“네. 오늘 여기서 자고 내일 내려갈게요. 엘레나는요?”
“오늘도 바다 가서 실컷 놀고 조금 전 들어왔어. 춥지도 않은지, 어쩜 그렇게 바다를 좋아하며 노니? 하루종일 놀더라.”
“캘리포니안이라 그런가 봐요.”
“그런가 보네. 밥은?”
“집에 들어가는 길에 사 먹고 가려고요.”
“그래. 잘 챙겨 먹고. 내일 봐.”
“네. 엄마.”
현정은 지숙과 아무렇지 않은 듯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와 생활에서 평온함이 느껴진다.
엘레나도, 할머니의 손길에서 따스함과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요즘 조금 숨 실만하다.
지하철에서 내린 현정은,
걸어서 인터넷에서 찾아낸 통닭집으로 가 통닭 한 마리를 주문하고, 생맥주도 두 잔을 마신다.
다 먹고 난 후, 집까지 소화도 시킬 겸 걷는다.
학창 시절 수도 없이 걸었던 길 아닌가.
물론 변한 곳도 있지만,
익숙한 길이다.
걷기에 딱 좋은 상쾌한 밤공기와
불빛이 환한,
서울의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