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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ther Jan 31. 2022

영화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2014)> 리뷰

당분간 지속하기로 해요, 이 사랑은.

다비드 뤔 감독의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2014)>는 할리우드에서 그려내는 신세대 뱀파이어 -인간 흡혈을 거부하거나, 인간 사회를 동경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하는-와 달리 고딕풍 유럽 전설의 냄새를 잊지 않은 작품이다. '노스페라투(Nosferatu)'라는 별칭까지 활용하며 지극히 전통적인지라 현대에 이르러선 오히려 잊히고 만 뱀파이어의 전승을 구현한다. 마늘을 기피하거나, 강박적으로 숫자를 세고 관 속에서 잠들며, 햇볕을 피해야 한다던가, 누군가의 장소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그러면서도 감독은 뱀파이어에게 숙명적으로 따라오는 '떠도는 자'의 운명을 삭제하고 범접 불가능한 초월자의 모습 대신 병적인 모습을 의도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영화의 무게를 반감시켰다. 이에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는 가벼운 코미디로 즐기는 데에도 무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뱀파이어 소재를 다룬 여타 다른 작품처럼 인간 존재/주체에 대한 인식론적 담론 위에서 이해해도 괜찮을 듯하다.



이미지 출처: IMDb


이야기의 골자는 이렇다. 수백 년을 살아온 뱀파이어 폰 쾨즈뇜 백작(토비아스 모레티)은 자신의 부인인 엘사(자넷 하인)와의 삶에 염증을 느낀 지 오래다. 백작부인은 스스로의 모습을 잊은 지 오래인지라 끊임없이 쾨즈뇜 백작에게 자신의 외모를 묘사해달라고 요구하는데, 그 한 두 마디조차 이젠 지겹기 그지없다. 그런 그가 햇볕에 스스로를 내맡겨 자살하지 않은 까닭은 그저 오래전 환생을 약속한 연인 나딜라 때문인데,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에 지친 그는 프로이트 교수(칼 피셔)에게 심리 상담을 요청한다.



프로이트 교수에게 찾아오는 환자는 여럿이지만, 그의 집에 드나드는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화가 빅토르(도미닉 올라이)다. 그는 프로이트가 상담하는 환자의 꿈을 들으며 화폭에 옮긴다. 그런데 늑대인간과 관계를 맺고 어두운 숲 속을 헤매는 인물의 모델은 동일한 인물이다. 바로 자신의 여자 친구 루시(코넬리아 이반칸). 빅토르는 눈을 감고도 루시를 완벽하고도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지만, 정작 루시는 빅토르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못마땅해한다. 빅토르는 갈색 머리칼을 묶고 바지를 즐겨 입는 루시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자신이 소망하는 구불거리는 금발과 드레스를 입은 모습으로 그리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IMDb


전통적으로 뱀파이어를 다룬 영화/문학은 이분법적 구도 위에서 성립한다. 선과 악, 질서와 혼란 등이 그 간결한 예시다. 뱀파이어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성을 상정하며 인간 존재가 꿈꿀 수 없는 극단의 세계를 기반으로 하니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에서 묘사하는 뱀파이어는 죽은 자의 귀환을 이끌며 혼란을 발생시키는 두려운 자로 인간과 대비되었고,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 -원작은 앤 라이스의 소설이지만, 이 글에선 영화에 한정하여 이야기하도록 한다- 에서 뱀파이어 루이와 레스타는 뱀파이어로의 삶을 선택하였음에도 끝없는 허무와 혼란에 방황하고, 클라우디아는 성장과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고착화된 시간 속에서 참혹함을 느낀다. 이렇듯 뱀파이어 세계와 인간 세계의 뚜렷한 대비는 독자/시청자인 우리가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지를 다시금 돌이키게 되는 계기가 되곤 하는데,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는 그 궤가 다소 다르다. 뱀파이어가 사는 세계와 인간이 사는 세계의 레이어는 분명히 겹쳐있고, 그들이 영위하는 사회의 경계선은 불분명하다. 이러한 배경이 성립될 수 있었던 까닭은 영화를 이끄는 주요 동력은 뱀파이어/인간 세계의 대비가 아니라, 등장하는 주요 인물 각자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욕망이란 사회를 꾸리는 종족이라면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무엇이지 않던가.



이러한 전략을 위해 뱀파이어는 인간을 압도하는 존재로 설정되지 않았다. 물론 이슬람 광신도에게 사망했다는 연인 나딜라의 이야기나 성에 사는 귀족으로 이미지화된 쾨즈뇜 백작의 모습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며, 한 마리의 야생늑대처럼 빠르고 강하며 흡혈을 망설이지 않는 백작부인의 모습은 뱀파이어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는 전설을 떠올리게끔 한다. 그러나 뱀파이어의 능력은 위계질서를 만들 만큼 강력하지 않다. 물리법칙을 어기는 종족임에도 백작은 심리적으로 지쳐 상담을 필요로 하거나, 과거에 잃은 사랑을 기다렸으며, 백작부인은 자신의 모습을 잊어 인간 화가 빅토르를 찾아간다.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는 뱀파이어는 결코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더군다나 영화는 뱀파이어의 흡혈 장면에서 선악을 논하지 않고, 범법을 무신경하게 저지르는 뱀파이어의 고뇌에 대해 초점을 맞추지도 않는다. 영화 제목에 '뱀파이어'가 삽입되어 있고, 사건의 시작이 첫사랑을 잊지 못한 폰 쾨즈뇜 백작에게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뱀파이어라는 존재는 대상화된 타자이다. 달리 말하자면, 감독이 주목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루시-혹은 루시의 욕망-다.



이미지 출처: IMDb


위에서 말했듯 루시는 갈색 머리칼을 묶고, 바지를 입은 차림으로 등장하는데, 레스토랑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자신의 모습에 긍정하는 여성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어떤 모습이든 사랑하겠다고 말했으면서도 은연중에 변화를 갈망하는 빅토르의 이중적 행태에 분노한다. 이런 상황에서 루시와 폰 쾨즈뇜 백작이 만난다. 프로이트 교수의 집에 놓은 루시의 초상화를 발견한 백작은 그가 자신의 옛사랑 나딜라와 놀라우리만큼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챈다. 빅토르가 캔버스 위에 상상 속 루시를 구현했다면, 폰 쾨즈뇜 백작은 기억 속 나딜라를 루시를 통해 복원하고자 한다. 두 남자는 모두 루시 앞에서 사랑을 논하지만, 루시라는 인물이 지닌 본연의 욕망(존재하는 그대로 사랑받고자 하는 소망)은 거듭 소외된다.



백작부인의 욕망 역시 영화 내에서 소외당하는 듯 보이나, 이는 백작부인 개인으로서의 소외라기보단 뱀파이어 종족 자체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라 보아야 합당할 것으로 보인다. 백작부인은 '여성 뱀파이어'로서 영화 내에서 전통적인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첫째, 그는 폰 쾨즈뇜 백작보다 더 야성적으로 묘사됨으로써 사회가 관습적으로 요구하는 남녀의 역할을 전복하는, 완전한 괴물로서 기능한다. 둘째, 그럼에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라고 백작에게 요구하고, 루시와는 달리 치장에 매달림으로써 언뜻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다움을 잃지 않은 존재로 나타난다. 즉 백작부인은 한 명의 독자적인 개인이라기보다는, 문화 속 '여성 뱀파이어' 그 자체의 현현이기에 어떤 수를 써도 자신을 볼 수 없는 종족의 한계를 넘고자 하는 '채워지지 않는 자아의 욕구(박일아)'를 끊임없이 소망한다. 백작부인은 그러하므로, 최은주(2010)의 표현과 같이 "결코 존재가 가능하지 않은 존재"임을 증명하는 개인이었고, 욕망을 이뤄내지 못한 육체는 끝내 소멸한다.



이미지 출처: IMDb


반면 루시는 기나긴 여정 끝에 자신의 욕망을 성취한다. 굳이 '기나긴 여정'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루시가 뱀파이어가 되는 일이 적지 않게 고달팠기 때문이다. 그는 백작부인에게 물린 이후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프로이트 교수의 침대에 놓인다. 그곳에서 흡혈 충동을 느끼고, 인간과는 다른 힘을 얻었다는 우연한 깨달음을 통해 자신이 뱀파이어로 변했음을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루시는 자기 존재에 대해 조금도 섬뜩함을 느끼지 않는다. 낯섦에 방황하지 않고 루시는 오히려 자신의 힘을 긍정한다.



루시가 느낀, 기존의 정체된 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해방감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루이가 한 선택과는 결이 다르다. 루이가 허무를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도피성 선택을 하였다면, 루시는 뱀파이어로서 더욱 삶을 풍성하게 살 수 있음을 깨닫고 '뱀파이어 되기'와 '뱀파이어로 살기'를 선택한 셈이므로. 특히 뱀파이어로 변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피를 수혈하면 돌이킬 수 있다는 옵션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루시의 '뱀파이어 되기'는 일종의 선택지에 불과할 뿐 운명론적 관점에서 벌어지는 유일하고도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루시가 뱀파이어로 변했던 첫 번째 순간은 어떠한 정보도 없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으나 두 번째 순간, 루시는 쾨즈뇜 백작에게 선언한다. 뱀파이어로 살고 싶으며, 나딜라도 루실라도 아닌 루시로 살 것이라고.





많은 영화에서 뱀파이어로 변한 인간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 윤리를 손쉽게 저버리고, 욕망을 발현하곤 한다. 그런데 <신경쇠약 직전의 뱀파이어>는 다르다. 이 영화는 뱀파이어를 사회의 거부, 개인의 불순응, 종족의 본능 등의  사유로 '떠도는 존재'라기보다는 일부분 '정착이 가능한 존재'로 묘사했다는 점에서도 한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루시의 욕망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기 때문이진 않았을까?



강정구, 김종회 (2011)는 뱀파이어라고 하는, 현실에 부재하는 종족을 상상하고 창작물을 자아내는 일은 곧 "타자를 경유하여 인간 그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이 영화에서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빌어 전달하고 싶었던 인간/인간사회의 단면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관람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단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루시가 힘을 얻었을 때, 공포로 가득한 세상을 열어젖히지 않았다는 게 마음에 든다고. "‘나’의 이야기와 분리될 수 없는 너(이혜정, 2020.)"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은 것이 좋다고.


★★★




참고문헌

강정구, 김종회 (2011). 뱀파이어라는 타자에 대한 상상. 비평문학(40), 7-30

박일아. (2013)."내면화를 통해 장르개념을 탈피한 새로운 유형의 뱀파이어 영화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이후 변화를 중심으로-" 현대영화연구 9.1 pp.32-56

윤은애 (2010). 라캉(Jacques Lacan)과 여성의 히스테리적 글쓰기. 우리문학연구, 29, 327-363.

이혜정 (2020). 내러티브 윤리학과 여성주의 주체 – 내러티브 윤리학은 여성주의 주체에 어떻게 기여하는가 -. 철학연구, 127-148.

최은주 (2010). 「성별화된 몸, 그 의미와 잉여의 두께-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영미문화 제10권 3호 한국영미문화학회 275-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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