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고해를 견디게 하는 촌극, 그 이면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우연과 상상>을 감상했다. 러닝타임은 두 시간가량이지만 세 개의 옴니버스가 엮인 영화이기에 각 단편은 30-40분쯤 된다. 이것은 각본이 의도적으로 특정 주제만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며, 실제로 영화는 각기 다른 상황의 인물이 ‘우연’ 속에서 ‘상상’하는 모습을 거듭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끊임없이 기대 지평을 배반하는 각본을 통해 관객 역시 영화를 감상하는 도중 여러 상상을 하고, 자신에게 이러한 우연은 없었는지 생각하게 되기에, 제목 자체가 적지 않은 확장성을 지닌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우연과 상상이란 존재가 가질 수 있는 보편 경험일 테니.
앞서 언급했듯 <우연과 상상>은 세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기묘한 애정 전선을 통해 우연이 낳은 상상을, ‘문은 열어둔 채로’는 앙심을 품은 개인의 상상과 우연이 맞물리며 맞이하게 되는 어떤 파국을, ‘다시 한번’에서는 우연과 상상이 동시 결합하여 빚어낸 가슴 아린 재회를 그린다. 모든 에피소드는 단절되어 있으나 대다수의 장면이 한정된 공간에서 인물들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선 분명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이렇듯 특별한 액션이나 빠른 화면 전환조차 없어 단조로워지기 쉬운 세 개의 단편에 감독은 121분 동안 ‘우연’과 ‘상상’을 예상치 못한 곳에 배치함으로써 매번 새로운 활력과 긴장감을 불어넣는데, 이 솜씨가 정말이지 굉장하다. 상영관에서 다른 관객과 웃음과 탄식을 공유하는 건 참 오랜만이었지 않았나, 생각했을 만큼.
※ 이하 스포일러 주의
세 에피소드
각 에피소드의 플롯을 간략히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우연히 태어난 삼각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츠구미(현리)는 업무를 통해 친해진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에게 최근 만난 한 남자, 카즈아키(나카지마 아유무)에 대해 말한다. 그는 아직도 2년 전 헤어진 전 여자 친구를 떠올릴 만큼 순정이 깊은 사람이기도 하다. 소중했던 순간을 말하는 츠구미의 이야기가 너무도 따뜻한 탓에 그와 카즈아키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지는 즈음, 영화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카즈아키의 전 여자 친구가 바로 메이코라는 사실이다.
두 번째 이야기인 ‘문은 열어둔 채로’ 역시 첫 번째 에피소드처럼 세 사람이 주요하게 등장한다. 취업이 예정되었던 사사키(카이 쇼마)는 교수 세가와(시부카와 키요히코)가 재학 중 취업자에 대한 특례 인정을 해주지 않아 유급생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미래가 어그러진 것에 대해 세가와를 원망하고, 그의 명성에 흠집을 내고자 불륜을 저지르는 파트너이자 늦깎이 대학생인 나오(모리 카츠키)에게 교수를 유혹해 달라고 부탁한다. 나오는 문이 열린 세가와 연구실에서 그의 신작 소설(심사위원조차 노골적인 행위 묘사라며 지적했던 페이지)을 낭독한다. 연구실의 문이 열려있는 동안엔 그 누구도 나오와 세가와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나오의 녹음 파일이 타인의 손에 떨어짐에 따라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운명을 겪게 된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다시 한번’은 20년 만에 고향을 찾은 나츠코(우라베 후사코)의 이야기다. 동창회에 어울릴만한 타입이 아님에도 그는 그리워하던 친구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고향을 찾는다. 허탕을 쳤다고 생각했으나, 우연히 나츠코는 기차역 앞에서 아야(카와이 아오바)를 마주한다. 아야의 집에 초대된 후에야 나츠코는 그가 자신이 찾던 사람(유키)이 아닌 걸 알고, 아야 역시 도쿄로 갔던 다른 동창과 나츠코를 착각했다는 것을 깨닫지만 둘의 이야기는 더욱 깊은 곳으로 향한다.
우연/상상을 포용하는 인간의 선택
우연이란 무엇인가? 하마구치 감독은 "우연이 있는 것이 이 세상의 리얼리티”라고 말했다는데, 운명을 한눈에 알아볼 수 없는 인간의 입장에선, 완전한 필연이란 조작된 가상의 세계 – 시나리오 따위 – 에서만 허락된 것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매일같이 발생하는 무수한 사건 중 결국 우리가 ‘기억하기로 선택'하여 우연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일련의 사건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적나라하게 설명하는 무엇이지 않을까.
만일 우연을 관계에 기초한 불확실성, 그러니까 타인과 자신이 유관하다는 전제 하에서 발생하는 불확실한 사건들의 연속이라 정의한다면,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메이코는 우연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메이코는 자꾸만 모르겠다는 말을 거듭한다. 무책임한 발언일지도 모르겠지만, 메이코에게 있어 ‘모르겠다’는 고백은 자신이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다. 그런데 메이코가 츠구미의 이야기를 듣고서 카즈아키를 2년 만에 찾아갔을 때, 관계의 주도권이 옮겨간다. 카즈아키는 분명 헤어진 후에도 메이코를 잊지 못했지만, 최근 관심이 생긴 사람이 그가 아니라면 메이코를 따라가지 말라는 부하직원의 충고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에 산재한 우연이 인간에게 운명처럼 다가온다고 생각하지만 우연은 기실 우리가 인지하고 운명이라 받아들이는 순간 발생한다는 것을 이보다 더 근사하게 비유할 수 있을까. 결국 메이코는 자신의 감정을 말하지 홀로 거리를 걸으며 사진을 찍는다. 그가 찍는 것은 완공되지 않은 거리의 풍경이며 나뭇가지로 막혀 트이지 못한 하늘이다. 메이코는 예기치 않게 진실을 발견하였을지라도 사랑을 이어나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불확실성을 확언하는 데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 메이코이기에 그가 사랑을 인식하는 데에 시간이 소요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순간이 자신만을 위해 적절하게 찾아오지는 않는 법이니, 상실 역시 마땅한 결과물로 받아들여야 하리라.
이렇게 우연 자체의 속성을 파고든 이후 등장하는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감독은 인과관계가 보이지 않는다며 우리가 우연이라 적당히 부르는 사건이, 사실은 스스로가 뿌린 씨앗의 결과물이 아닐까 의심해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나오와 세가와의 이혼/지위 박탈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은 사사키의 비대한 자아(자신은 이보다 더 나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를 접점/시발점으로 하여 파생되었을지라도, 뜯어보면 인물 각자가 자초한 결과이기도 하다. 사사키는 자신이 프랑스어 강의를 수강하지 않았으며, 나오는 가족이 있음에도 내연관계를 저버리지 않았고, 세가와는 나오에게 녹음파일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나. 그리고 5년 후, 나오와 사사키는 우연히 버스 안에서 만난다.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속성조차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인생에서 필요하다고 말한 세가와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인지 나오는 사사키를 껄끄럽게 대하던 태도를 철회하고 자신의 명함을 건넨 후 세가와와의 관계를 회복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이는 이전보다 성숙한 모습이었으나 사사키는 거부한다. 나오의 손을 빌려 세가와를 응징하는 데에 성공했음에도 사사키는 자기 우월감에 도취된 상태에서 답보하는 셈이다. 이에 나오는 자발적으로 유혹을 선택한다. 그저 한 번의 마주침으로 끝날 수 있었던 긴장은 그리하여 연장되고, 우연이란 인간의 선택으로 인해 동일한 패턴으로 영원 회귀할 수 있음이 암시된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당신은 분명히 내 기억 속 누군가일 것'이라는 믿음이 부른 상상의 부산물이다. 충분히 어색해질 수 있음에도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완전히 정립한 중년은 흔들리지 않는다. 서로를 나츠코의 옛 연인/아야의 친구라 상상하며 역할극을 진행함으로써 나츠코는 하지 못한 말을 토해내고, 아야는 자신조차 바라보지 못했던 내면을 이끌어낸다. 마음 깊은 곳의 공허를 메웠다기보다는 공허를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놓은 두 사람은 묘한 연대를 이룩하고, 이는 역 앞에서 헤어지던 순간 아야가 동경했던 20여 년 전 동창의 이름을 나츠코에게 말하는 장면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 아야가 기억해낸 이름이 노조미(소망)이라는 점은 퍽 의미심장하다. 이렇듯 우리는 우연을 통해 후회를 털어내거나 잊었던 꿈을 되찾음으로써 성장할 수도 있는 셈이니,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해리에게 덤블도어가 건넨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진정한 모습은, 해리,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을 통해 나타나는 거란다."
영화를 본 후, 우리네 일상을 시나리오로 만든다면 이보다 더 엉뚱할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했다. 매일같이 마주하는 촌극에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한데, 영화든 현실이든 기대를 배반당하는 지점은 한결같이 우스꽝스럽다. 역시 삶은 원경에서는 희극처럼 보일지언정 가까이에선 비극이 반복되는 것이 아닐련지. <우연과 상상>은 그런 점에 있어 더없이 훌륭한 리얼리즘 영화인 듯 싶다.
★★★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