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together, Stick together
켄 로치 감독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로 처음 만났다. 희망을 손쉽게 내어주지 않는 그의 단호함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을 보았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긴 필모그래피 중 내가 감상한 건 고작 두 편에 불과하지만 스무 편 이상의 영화가 더께처럼 내 안에 쌓여가는 동안에도 그의 영화는 강렬함을 잃지 않고 살아남았고, 켄 로치의 영화는 어떤 영화든 분명 어떠한 울림을 갖고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렇기에 오랜만에 켄 로치를 스크린으로 만날 수 있게 되어 대단히 기뻤다.
일단 감독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 보자. 그는 블루 칼라의 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노동 계급에 관심이 많으며, 눈에 띄는 연출을 거듭하는 감독은 아니다. 극히 평범한 인물의 생활상을 통해 부조리함을 일깨우고 현재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담담하게, 효과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달리 말하자면 켄 로치는 영화를 구성할 때, 희망이 아니라 좌절을 선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의미이다. 그의 영화가 아무리 담백하더라도 어쩐지 러닝타임 내내 긴장을 느꼈다면 아마 이런 맥락 때문이리라.
나는 몰랐으나, 그가 은퇴를 번복했다고 한다. 어떤 이유로 그가 메가폰을 잡았을지는 찾아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우리가 보는 세상이 참으로 수상쩍지 않은가. 인간이 마땅히 갖추어야 하는 존엄은 자꾸만 증발한다. 살아있는 존재는 존재 증명을 강요당한다. 특히 이번 영화 <나의 올드 오크>는 시리아 난민 사태가 주요 테마였으므로 이 비참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영화 <사마에게>를 함께 권한다). 난민이란 타국은 물론 고향에서조차 ‘생존권’조차 보장받기 힘든 약자이므로.
다만 우리는 상대적으로 난민 사태를 피부로 느끼기 힘든 지역에 살고 있기에, 퍽 괜찮아 보이는 주거 환경부터 보장받는 그들이 영국의 많은 복지 혜택을 누리는 것처럼 느낄 지 모른다. 정주민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영국은 유럽국가중에서도 강경한 정책을 취하는 나라이다. 국민호와 양연희(2019)의 연구에 따르면 21세기 이후 영국의 반 난민정서는 정치계와 언론 등이 조직적으로 연계되며 점층적으로 심화되어왔으며, ‘비호 신청자들의 굴종을 유지’시키기 위한 다양한 통제 정책을 개발해 온 것으로 보인다. “착취 논리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 만든다”는 말마따나, 난민을 쉽사리 포용하지 않는 영국 사회의 분위기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영화 내에 반영되어 있다. 정주민의 끝없고 부당한 혐오는 놀라울 지경이며, 주인공으로 설정된, 상황의 부조리함을 이해하는 발렌타인조차 몇 번이고 침묵한다. 이 부자 나라에서 그들을 돕지 못하는 환경은 우스꽝스럽고 잘못된 게 틀림없다고 지적하면서도, 펍을 방문한 손님이 오랜 우정을 들먹이고 더 이상 오지 않겠다거나 참지 않겠다며 반 협박에 가까운 말을 건넬 때엔 자신의 처지를 걱정하는 장면을 통해 우리는 인물의 반응에 분노하면서도, 처지에 공감하게 되는 분열을 겪는다. 어쩌겠는가. 그 역시 간판 하나조차 제대로 바꿔 달지 못하며 보험조차 최소한으로 들었던 그 역시 삶의 공간이 대단히 좁은, 평범한 영국인일 뿐이다.
그러나 켄 로치는 이런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거나, 더이상의 방법이 없다며 손을 놓지 않는다. 그는 굳건하게 "When you eat together, you stick together"를 말한다. 희망은 너무나 많은 고통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고통을 안기는 건 낙담이자 정지라고. 그렇기에 야라는 꿋꿋하고 당당하게, 끊임없이 걸으며 연대를 이끌어낸다. 부정당한 듯 보인 순간조차 이후의 친절을 위한 예고에 불과했다는 건 지나치게 동화적인 듯 보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런 낙관에 의지해 삶을 이어가는 법 아니겠는가. 상실을 아는 사람은 강하다. 외지인을 거부했던 소녀의 어머니가 다리를 놓아준 미용실에서 사진을 찍고, 강아지를 잃은 발렌타인에게 식사를 전한다. 마음은 한 번 두드리는 것만으로 열리지 않는다. 지속성은 결국 공동체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시켰다. 여주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마을 전체는 그를 애도했다.
이러한 변혁이 모든 난민에게 주어지진 않을 것이다. 특히 영국이라면 – 말했듯, 영국은 난민 문화에 굉장히 각박한 나라이므로 – 더더욱 힘들 것이다. 또한 켄 로치가 말했듯 “영화는 대중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매개체“이지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진 못한다. 기실, 예술이란 얼마나 무용한가? 엔도 슈사쿠의 말을 살짝 비틀어 옮기자면, 영화든 예술이든 인간에게 즉각적인 효과를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무용하며 지금 당장 병을 치료하고 삶에 변혁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그리고 대중은 이런 무용함에 지쳐 언제든 잔혹하게 떠나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두 가지 방면으로 관객을 엷게 흔들고 설득한다. 난민을 수용하는 일은 공동체를 위한 선의의 약속이자 지향이라는 윤리적인 점에서도 중요하되, 장기적으로 “다양성은 부담이나 결핍이 아니라 다양성의 조화를 약속할 수 있다면 우리사회를 더 강하게 만드는 진보적인 힘”이기도 하다고. 어떤 부분이든 우리가 잊어선 안 되는 가치라고 말이다.
켄 로치가 영화를 빌어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게 너무도 분명하기에, 주인공인 야라의 꿈이 사진가이며, 영화의 시작이 사진기의 파괴였다는 점은 몹시 흥미롭다. 영화 속에서 카메라는 내가 겪는 현실과 당신의 현재를 포착하는 기록이자 아버지가 남긴 사랑의 상징이다. 또한 발렌타인의 역사를 증언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카메라가 포착하고 인화하여 출력되는 건 단순한 시점의 공유가 아니라 경험의 재생산이자 확대이다. 현실을 왜곡하는 사진과 영상 또한 온라인을 떠돌지만 이게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건 자명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마을의 모든 이가 태피스트리를 깃발처럼 내걸고 행진하는 장면은 결국 우리에게 포착되지 않았는가. 그렇다. 우리는 결국 나아갈것이다. 더 나은 세계로. 같이 밥을 먹을 줄 안다면. 그러니까, 타자화 없이 수평적인 공간에서 함께한다면.
참고문헌
국민호, 양연희. (2019). 유럽의 반 난민정서 강화와 영국 비호신청자의 참상. 디아스포라연구, 13(1), 95-134.
김새미. (2020). 난민과 공생: 문화예술 활동을 통한 관계 맺기. 문화와 정치, 7(1), 69-103.
윤종욱. (2020). 켄 로치 영화의 변화와 연속성: 〈캐시 컴 홈〉(1966)과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비교 분석. 영화연구,(85), 5-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