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스며든 삶

예술에 대한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고찰

by 맞아요

“이 밴드, 정말 좋아. 들어봐.”


핑크 플로이드를 고등학교 친구로부터 접했다. 예술이라는 것이 그렇다. 내가 그 밴드 음악을 향유할 수 있게 된 순간, 나의 세계가 확장된다. 대중음악만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음악의 세계라는 것은 굉장히 넓다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아니 그보다 나는 왜 여태껏 이런 음악의 세계를 알지 못했을까 하고, 나의 삶을 돌아보았다. 음악만이 아니라 나는 문학을 접할 때도 같은 질문을 했다. 분명 나는 나의 삶에서 예술이라는 세계를 넓힐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다. 그런데, 이 축복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운명이었을까.


그렇다면 예술을 접하지 못하는 운명도 있나.


나는 운명이라는 것을 아주 오래전부터 싫어했다. 죽음도 나의 운명이라는 것을 책가방 메기 전부터 알게 됐다. 그리고 나는 밤마다 눈물을 머금고, 옆에 누운 할머니에게 죽음에 대해 캐물었다. 할머니, 죽으면 어디로 가? 할머니도 거기에 있어? 안 죽는 사람도 있어? 할머니, 나는 안 죽고 싶어.


지금 나는 생각한다. 예술을 향유하는 것도 운명이라면, 내가 앞으로 접하지 못할 것도 있을까. 내가 예술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그리고 나는 예술을 왜 가지려고 할까.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어떠한 답도 찾지 못했다. 반대로 나는 어쩌면 내 예술성에는 자유의지가 없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 친구로부터 음악의 세계를 넓히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누군가에게 향유의 능력을 부여받은 것이지, 터득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말 나의 예술에는 자유의지가 없을까. 하지만, 이 자유의지 문제는 예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나의 모든 삶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이었다.


티비를 보다 문득 웃음이 터져 나온다. 내 친구가 티비 속 이 장면을 봤더라면 분명히 입술을 씰룩거리다 나를 바라보고는 참지 못해 웃었을 것이라고. 나의 모든 유머 코드를 만들어준 그 친구가 이제는 없는 지금. 나는 무엇을 보고 웃어야 하나. 나의 의지로 웃을 수도 없는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할 수 있었나. 나는 그저 그 친구를 대신해 웃으며 살아오지 않았나. 이런 내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무기력해지곤 했다.


하지만 나 또한 누군가의 일부임을, 그 누군가도 내 삶의 일부를 살아가고 있음을 안다. 그 누군가가 나 대신 웃어주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며. 너도 나의 삶을 살고, 나도 네 삶을 살고.


신경숙 작가의 책에서 “삶은 그만큼 다양한 거 아니냐고. 문학이 끼어들 수 없는 삶조차도 있는 법 아니냐고”를 읽는다. 친구가 처음으로 밴드 음악을 나에게 알려줬을 때가 떠올랐다. 나는 음악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취향이 ‘뛰어난’ 예술적 소양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예술을 꿈꾸는 나 자신에게, 예술을 하는 것이 뭐 대단한 것이냐고 도리어 화를 냈다. 예술이 스며든 삶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받은 삶이 아니냐고.


그래서 나는 나에게 자유의지 따위 생각하지 말 것을 약속했다. 예술이 대단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문학이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나는 문학이 스며들 수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만하지 않겠다고. 다양한 삶의 세계에서 나는, 운명이든 아니든 문학을 꿈 꾸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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