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인간의 삶을 유지하게 하는 건 어쩌면 사소한 희망 때문이다.
2019. 10. 11.
살아가는 데 작은 희망도 없다면 정말로 살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사람의 일도 예고 없이 일어나듯 가을의 추위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분명히 어제는 낮에 반소매 옷을 입어야 할 정도로 따뜻했는데 하루아침에 일기예보 우선 검색어가 ’한파 주의‘가 검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겨울에나 있을 그런 차갑고 따가운 추위는 아니었으나 피부가 매우 건조해지고 손끝이 저릴 정도로 차가워지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런 듯,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이렇게 커지는 이런 시기, 계절이 끝나가고 시작되는 무렵에는 건강에 특히 유의해야 하는데 몸이 부쩍 더 나른하고 몸살 기운이 도는 것이 무엇을 조금만 해도 금방 피로를 느꼈다. 그리고 한밤중 잠자던 아이들이 느닷없이 기침하는 것도 전부 다 이 환절기라서 그러는 것이라고, 학교에 보내기 전 시럽이라도 한 숟가락 떠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작은 아이가 브레인센터, 난독증 치료 교실에 나가기 시작한 지도 어느새 넉 달째로 접어들고 있다. 학교에서 보는 받아쓰기 시험에서 연거푸 90점을 받아온 건 이 주 전부터 일이다. 사실, 그 이전 아이의 성적은 거의 0점에 가까운 점수였는데 무작정 기뻐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앉혀 놓고 읽기를 해 보면 여전히 매끄럽게 글자를 읽지 못했고 사실 그전에도, 난독증 진단을 받기 이전에도 받아쓰기에서 100점을 받아왔던 적도 종종 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로서, 아이의 모습이 이전보다 더 밝아지고 있고 계절이 가져온 여유 탓인지 풍기는 분위기 자체도 훨씬 더 여유로워져 좋아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시간이 증명해 낼 그 결과에 대해 비관하지도 그렇다고 너무나 낙관하지도 않을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는 데 있었다. 어쨌든, 아이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변화는 아주 미미한 부분일지라도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일부러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사람이 엄청나게 대단한 꿈을 꾸고 살지는 않더라고 삶에서 사소한 희망이라도 없다면 그 삶이 얼마나 지치고 지루한 것이 될지를 충분히 알고 있지 않았던가.
요즘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이제 거의 마지막 부분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여전히 산티아고 노인조차도 자신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의 정체를 분명하게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매우 대단히 덩치가 크며 자신과 두뇌 싸움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영리한 물고기라는 것이었다. 책을 읽던 도중 아주 잠깐 잡힌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가 수면으로 살짝 올라오는 것을 보는데 바로 지느러미의 방향이 수면과 수평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큰아이는 나의 예상대로 이 부분에서 이렇게 말했다.
’엄마! 노인이 잡은 물고기는 고래일 거예요, 고래의 꼬리는 몸통과 수직으로 되어 있으니 수면과는 당연히 수평으로 보이는 거죠.‘
큰아이에게 매우 훌륭한 의견이라고 칭찬한 후 한 가지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사실, 고래는 포유동물에 속하며 엄청난 몸 크기를 자랑하는 향유고래부터 덩치가 작은 돌고래 종류까지 매우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혹등고래나 범고래와 같이 몸무게가 몇 톤이나 되는 것들이 가끔 바다 수면으로 수직으로 높이 솟구치며 하얀 물보라와 물거품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도 바로 그 고래의 꼬리지느러미 때문이라고 말해 주었다. 보통 물고기와 달리 몸통에 수직으로 나 있어 엄청나게 무거운 무게도 뛰어오르게 할 수 있는 추진력을 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젖을 물려 새끼를 키우는 것만이 특별하게 생각해 왔다면 고래의 꼬리야말로 고래만의 특별한 특징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인간에게 시련이란 예고 없이 닥쳐오기 마련이지만 예감하는 시련은 거의 꼭 일어나게 되는 법이다. 물고기의 피 냄새를 맡고 상어가 노인과 잡힌 물고기를 따라온 것이다. 그것은 마코상어였다. 거의 가장 빨리 헤엄칠 수 있는 상어로 알려진 마코상어, 치타와 함께 경주 시합을 한다면 거의 맞먹을 정도로 가장 빠른 청상아리였다. 마코상어는 물고기의 꼬리 부분을 크게 한입 베어 먹고 노인의 작살을 맞고 작살이 꽂힌 채 검고 차갑고 컴컴한 바닷속으로 꼬리 한입에 운명이 갈린 것이다. 사실 그러고 보면 [노인과 바다]를 다섯 번 정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이렇게 연극을 하듯이 나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읽어줄 때의 느낌을 왠지 특별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히 노인은 인생의 허무를 알고 있을 정도로 약해졌고 피로하고 늙은 상태다. 하지만 거의 인생의 후반부에서 생전 잡아 보지 못한, 여전히 본인조차도 그 크기를 정확히 확인하지 못한 물고기를 잡고 희망이라는 마음으로 적당히 흥분해서 활기를 되찾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1999년. 11월. 정확히 20년 전,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책 선물 표지 안쪽에 ’전자는 헤밍웨이의 비극이라고 느낀다. 후자는 인생의 무의미를 생각나게 한다.’라고 메모가 적혀있는 책을 선물로 받았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인생이 정말로 무의미한 것이라면, 그런 인생의 허무를 어쩌면 이렇게도 훌륭하게 그려낼 수 있단 말이던가. 나는 정말 멋진 글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작은 희망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결국에는 뼈만 남게 되는 게 인간의 끝이 될지라도 분명히 순간순간의 난관을 헤쳐나왔기 때문에 뼈 한 조각으로 남겨지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산티아고 노인이 ’인간은 패배하려고 태어난 존재는 아니야. 인간은 파멸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라고 했던 말의 의미를 나는 이제야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노인이 육지에 도착했을 때, 이미 배 안에 있는 모든 도구는 둘의 훼방꾼들을 처치하는데 다 써버리고 잡은 물고기만은 배에 묶은 채로 오게 되었지만, 그마저도 살점은 다 뜯겨나간 앙상한 뼈와 머리통뿐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상상하는 그 물고기는 고래가 아니라 참치의 종류인 청새치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이다음 나중에 스스로 저 [노인과 바다]를 읽게 될 때 자연스럽게 알게 될 사실이기 때문이며 그 정답을 알아낼 때의 순간의 기쁨을 미리 빼앗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에게 약속했던 그 일,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영화를 보여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이번 주말이 되면 불 꺼진 작은 방에 우리 넷은 조금은 서로에게 각자의 몸을 의지하기도 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그 영화를 볼 것이다. 그리고 삶이란, 어쩌면 대단한 꿈 때문이 아니라 어차피 소소한 희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크나큰 기대로 부담스럽지 않으나 그런다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버려 두지도 않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하루하루 조금씩 더 다정하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지혜로운 엄마로 다가가서 그들의 인생에 작은 희망의 씨앗들을 뿌려주려고 한다. 그것이 내 인생의 대단한 임무이기도 하거니와 나의 작은 행복이기도 하다.
아인슈타인이 학창시절에 수학 선생님에게서 들었던 치욕스러웠지만,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다준 이 말 한마디, ‘너는 수학 문제의 답을 알지만, 풀이 과정을 쓰지 못하므로 낙제생이야.’라고 했던 이 말은 사실 아인슈타인이 정말로 ‘바보, 모자란 아이’로 낙인찍는 말과 같았지만, 그것이 그만의 천재성이었다는 것을 알아준 사람은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꾸준한 관심과 사랑으로 매년 노벨상이 발표되는 이 무렵, 거론되는 인물이 될 수 있던 이유였다. 인생을 크게 세 단계로 구분 지어 생각해 본다면 시작에 해당하는 첫 번째, 바로 이 순간순간이 엄마의 역할이 결국 아이들의 종국의 인생에 얼마나 많은 영향이 미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실인지 알 수가 있다. 이 순간, 나는 또다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면서도 앞으로 펼쳐질 나와 아이들의 삶에 대해 희망을 품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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