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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노마드 함혜리 Jan 21. 2023

건축 탐구] 프레임에 자연을 담았다.

건축가 정재헌, 중랑망우공간   

건축가 정재헌(경희대 교수)의 작품은 정갈하고 단아하다. 말없이도 많은 것을 얘기한다. 죽음을 다룰 때도 마찬가지다. 망우리공동묘지였다가 지금은 망우역사문화공원이라고 이름을 바꾼 곳, 그 초입에 들어선 중랑망우공간은 자연이 주인공이 되는 곳이다. 우리의 삶이란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말해주고자 했던 것일까. 끝없이 순환하는 자연 앞에서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 흙에서 왔으므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고, 그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자연으로부터 우리가 위안을 받는 순간을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이렇게 썼다. " 모든 걱정과 고됨이 자연의 원초적 힘 안에서 차분히 가라앉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지만 불가피하게 죽음을 맞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어쩌리. 죽음은 너무 가까이에 있고, 그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미약한 것을. 우리는 그래서 '사의 찬미'를 읊조리는 것이 아닐까.

정 교수와 모노건축사사무소 팀이 2019년 서울특별시 (도시공간개선단)에 제출한 망우리공원 웰컴센터 건립 설계공모 설계설명서에서 제시한 콘셉트는  'MERRY CEMETERY'였다. 기념비적인 건물보다는 존재감이 없이 자연 속에 녹아드는 건물로 디자인하면서 ‘망우(忘憂)’의 원래 뜻을 살리는 공간이 되고자 했다. ‘망우’는 논어 술이(述而) 편에 나오는 낙이망우(樂以忘憂)에서 따온 것으로 ‘(도를) 즐김으로써 근심을 잊는다’는 뜻이다. 설계자는 즐거운 공동묘지라는 것은 불가능할지언정 무섭거나 두렵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를 바랐던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묘지, 자연 그리고 건축 망우리공원의 역사적 의미나 기억을 떠올리기보다는  현재의 삶과 미래의 의미에 주안점을 두었다.  묘지의 이미지를 벗고 자연의 풍성함이  드러나는 장소를 만들고자 했다.


건축은 단지 자연을 담는 상자이며,  자연을 경험하게 하는 프레임으로 드러나기보다는  풍경 속으로 사라진다. 빛과 색을 뿜기보다는  자연을 흡수하고 끌어들여 원래 그곳에 있던 것처럼  익숙한 풍경이 된다.




겨울의 문턱에선 날, 세월의 무상함에 가슴이 절절하다. 고요한 장소를 찾아 삶의 의미를 되새기며 낙엽을 밟고 싶은 마음으로 발길을 떼어본다. 서울 중랑구 망우동과 면목동,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있는 망우역사문화공원은 이 계절에 딱 어울리는 장소다. 예전 모두가 혐오스럽게 여겼던 망우리 공동묘지는 이제 울창한 숲과 유명 인사들의 묘, 멋진 전망이 어우러진 공원으로 시민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일제가 1933년 조성한 망우리 묘지는 40년이 지난 뒤 분묘가 가득 차 1973년 5월 매장이  금지됐다. 방정환, 오세창, 한용운, 조봉암, 지석영, 박인환, 이중섭, 계용묵 등 근현대사의 인물들이 잠들어 있는 역사적 장소라는 의미를 살려 1992년부터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근현대 인문학의 역사를 떠올리는 기억의 장소를 부각해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고 2016년엔 망우리 인문학길을 조성하는 등 기피시설의 이미지를 탈피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지난 4월 공원 초입에 들어 선 중랑망우공간은 수려한 자연경관이 있는 인문적 자연공원으로의 변신 작업에 마침표를 찍은 건축물이다.    

중랑망우공간 /사진 박영채 작가

건축가 정재헌(경희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모노건축사사무소)이 설계한 중랑망우공간은 묘지공원 진입로를 따라 올라가는 초입의 완만한 능선에 자리하고 있다. 연면적 1247.25㎡의 2층 규모의 건축물은 능선을 따라 남북방향으로 길게 자리 잡고 있다. 건물의 길이가 120m, 폭이 18m. 길고 좁은 이 건물은 현상설계에서 주어진 대지를 온전히 사용해 지은 결과다.

주차장과 관리동을 통합한 웰컴센터는 건물이라기보다는 좁고 긴 길이다. 120m의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공간과 풍성한 자연을 경험한다.

좁고 긴 직선적인 건축물이 어떻게 능선을 타고 도로의 경사면에 들어섰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길을 건넜다. 그런데 길을 건너 바라봐도 건물의 입면이라고 할 만한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정 교수는 “이 건물은 존재감이 없고 풍경이 건물의 입면을 구성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건물이지만 입면이랄 것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복도와 회랑이 건물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회랑 사이, 계단실과 수 공간 사이로는 그저 비어있다. 비어있는 공간을 통해 보이는 것은 자연 풍경이다. 주변의 경관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여 자연의 정취를 만끽하는  전통적인 조경기법처럼 기둥 사이로 풍경을 담았다. 기둥 사이에 자연을 그대로 들여놓은 것을 정 교수는 “풍경을 프레임해 준다”고 표현했다. 건물은 막힘이 없고 자연과 사람은 그 사이를 넘나 든다. 의도적으로 건물을 지은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건물이 들어서 건물 스스로 자연이 된다.

“망우리공원의 역사적 의미나 기억을 떠올리기보다는 현재의 삶과 미래의 의미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묘지의 이미지를 벗고 자연과 공원의 풍성함이 드러나는 장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건축은 단지 자연 속에 놓인 상자이며, 자연을 경험하는 프레임으로 위치하며, 드러나기보다는 풍경 속에 숨어 있도록 했습니다. 빛과 색을 뿜기보다는 자연을 흡수하고 끌어들여 원래 그곳에 있던 것처럼 익숙한 풍경이 되도록 했습니다.”  

서울시와 중랑구에서는 인문학역사공원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건물을 원했지만 오히려 정 교수는 건물로 읽히지 않고 존재감이 없이 자연 속에 녹아드는 건물로 디자인했다. 또한 ‘망우(忘憂)’의 원래 뜻을 살리는 공간이 되고자 했다. ‘망우’는 논어 술이(述而) 편에 나오는 낙이망우(樂以忘憂)에서 따온 것으로 ‘(도를) 즐김으로써 근심을 잊는다’는 뜻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공동묘지를 네거티브하게 받아들이지만 서양에서는 죽음을 삶의 연장선으로 보고 묘지를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현재의 공간으로 인식합니다.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마음이 위로받는 행복한 공간,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장소로서 ‘행복의 묘지’를 추구하고 싶었습니다.”

정 교수는 “망우공원의 웰컴센터는 행복한 기억과 따뜻한 감동이 있는 명랑한 안식처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주어진 지형조건이 까다롭고, 공원심의를 통과하기가 힘들어 설계하는 데 시간이 많이 들었다”고 털어놓는다.  

높이 차이가 있는 능선인 데다 기댈 데도 없는 좁고 긴 지형에 건물을 짓는 프로그램을 풀어내는데 적잖은 시간을 들였다. 원래의 배치를 염두에 두고 디자인을 시작하다 보니 아무래도 잘 풀리지 않아 현장을 몇 차례 왔다 갔다 하면서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건물과 주차장의 배치를 바꿔서 스케치해 봤더니 그제야 풀리기 시작했다.

사진 모노건축사사무소 제공/ 박영채 작가

“주차장이 자리하고 있던 능선의 높은 곳에 건물을 짓기로 하고 지형조사를 해 보니 그곳이 기존에 관리동이 있던 자리보다 훨씬 좋은 자리였어요. 그다음엔 건물의 주차장을 어떻게 가릴지를 두고도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능선에 위치한 건물의 배치는 독특하다. 정면으로 바라봤을 때 도로보다 높은 왼쪽(북서부)에 건축물의 주된 매스를 배치했고 주차장은 도로보다 낮은 남동부에 배치했다. 건물 사이에 계단실의 역할을 하는 높은 벽을 만들어 주차장이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도록 했다. 건물의 1층은 무채색의 콘크리트 기둥으로 처리해 회랑의 효과를 냈다. 건물 2층에 120m 길이의 긴 테라스 겸 복도를 만들어 오른쪽(남동부) 끝 부분이 도로와 만나도록 했다. 공원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올라오는 길에 건축물의 단아한 첫인상이 드러나고, 공원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건물의 복도를 따라 걸어와 산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동선을 만들었다. 길은 땅에서 하늘로 이어지고 자연을 넘어 도시를 발견하게 한다.

사진 모노건축사사무소 제공/ 박영채 작가

정 교수는 “원래 이곳은 주차장과 관리사무실 외에는 자연뿐이었다”면서 “새로운 건물 또한 사람들이 능선을 따라 올라가는 길에 신발을 신고 실내에 들어갔다가 다시 산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진입이 자연스럽고 실내 공간을 최소화하는 디자인을 시도했다”고 설명했다.

길을 건너 건물에 들어선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회랑 사이로 들어간다. 원래 이곳이 추모공원인 것을 잊지 않으려는 듯 무채색의 회랑은 경쾌한 동시에 그리스 신전의 회랑처럼 경건한 분위기를 연출해 낸다. 회랑 기둥의 그림자가 차폐벽에 어른 거리면서 공간의 표정으로 드러난다. 잔잔하게 물이 담긴 수반에 하늘이 비친다. 주건물의 1층은 카페 등 휴식공간이다. 건물 뒤편으로 우거진 숲과 고요하게 늘어선 회랑이 절묘한 조화를 이뤄 경건함을 더한다. 여름엔 그늘진 야외 공간이 휴식의 장소로 유용하게 쓰일 것 같다.  

주차장과 경계에 설치된 콘크리트 계단을 오르다 고개를 들어 보니 콘크리트 사이에 네모난 하늘이 보인다. 2층의 직선형 테라스는 북측 묘지 공간으로 이어진다. 이 계단 구조는 주차장의 차폐와 층간 연결기능을 한다. 묘지와 하늘을 직감적으로 연결하며 경건한 사유를 유도하는 장치로도 작동한다. 2층에는 사무실과 전시실이 있지만 주된 역할은 전망대로서의 기능이다. 120m 길이의 테라스에는 주변 풍경과 다양한 조우를 경험할 수 있다. 가깝게는 망우산과 묘지 사이로 난 산책로가 보이고 멀리는 남산뿐 아니라 인왕산, 북한산, 수락산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실루엣을 볼 수 있다.

사진 모노건축사사무소 제공/ 박영채 작가

정 교수는 “1층에서는 기둥 사이를 투과하는 마이크로 한 풍경을 볼 수 있고, 2층에서는 기다란 테라스가 전망대의 역할을 하면서 가까이는 망우산의 능선을 보고, 멀리는 남산부터 불암산까지 바라볼 수 있다”면서 “건물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고 산책의 연장으로 여겨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건물은 우리의 삶을 담고 있는 듯하다. 언뜻 단조로워 보이지만 동선과 높이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시선의 방향이 달라질 때마다 새로운 풍경을 경험할 수 있다.

사진 모노건축사사무소 제공/ 박영채 작가

“나무를 보면 어떤 잎들은 봄날에 떨어지고 어떤 잎들은 노랗게 색이 변한 뒤에도 그대로 매달려 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시간을 이어가는 것을 보면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곳에서 천천히 걸으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


위의 본문은 서울신문 건축오디세이를 위해 작성한 것입니다. <사진 모노건축사사무소 제공/ 박영채 작가 >


사실 유럽의 옛 도시들을 가보면 교회나 성당을 중심으로 구 도심이 발달하고 그 근처에는 공동묘지가 있다. 좀 더 큰 도시에는 도시 안에 공동묘지가 있다. 프랑스 파리의 경우 남쪽에 몽파르나스 공동묘지, 북쪽에  페르라셰즈공동묘지가 있다. 공동묘지가 워낙 오래되고 규모가 커서  유명인사들의 무덤을 찾아가 보도록 지도가 마련돼 있다. 이런 곳에서는 죽음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고 망자가 살았을 때 이 세상에서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를 되새기게 된다.

망우역사문화공원(줄여서 망우공원)도 충분히 그런 장소가 될 수 있다. 오히려 자연경관은 훨씬 수려하다. 그곳에 잠든 인물의 면면에서도 문화적 가치가 크다. 그런데 솔직히 이곳에선 어딘가 가슴이 아려온다. 굴곡진 우리의 역사를 살았던 인물들 그들 각자가 이 생에서 품었을 아픔 때문이리라.


다음에 망우공원에 가게 되면 꼭 찾아보고 싶은 묘가 있다.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가 잠든 곳. '조선의 소반, 조선도자 명고'(학고재 출간, 1996)를 쓴 예술평론가다. 1914년 조선총독부 농공상부 산림과 산하 임업시험장에서 일하기 위해 조선에 왔던 아사카와 다쿠미는 황무지였던 조선의 녹화사업에 헌신했다. 동시에 그는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깊이 매료됐다. 조선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바지저고리를 입었고 조선의 가옥에 살았다.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으로 살아가던 그는 특히 조선의 소박한 목가구, 특히 소반과 덤덤한 백자에 빠졌다. 

서양 문물이 급속하게 밀려왔던 시기에 이 같은  생활 문화가 사라져 가는 것이 안타까워 전통 공예 분야를 깊이 연구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세심하게 애정을 담아 분류하고, 다큐멘터리처럼 만드는 방법과 쓰임새를 기록한 책이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31년 4월 2일 마흔 살 나이에 급성 폐렴으로 삶을 마감했다. 조선의 민둥산을 안타까워하며 전국으로 돌며 양묘법 보급에 힘쓰던 중 감기에 걸린 것이 원인이었다. 다쿠미의 장례식은 4월 4일 임업시험장 앞 광장에서 치러졌는데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그의 사망소식이 알려지자 몰려든 조선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는 이문리 조선인 묘지에 묻혔다가 해방 후 망우공원에 이장됐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아사카와 다쿠미의 공덕의 묘(淺川巧功德之墓)에 있는 비문이다. 묘지 오른쪽에는 그가 생전에 좋아했던 도자기 형상의 석조물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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