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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Oct 16. 2021

빈칸이 많아도 괜찮아요

<할머니의 사계절>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집에서 어른 걸음으로 스무 발짝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할머니는 늘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다'고 하셨다. 초등학교의 전교생은 늘 60명 정도로 유지되었고 한 학년에는 한 개 반이 전부였다. 한 학년이 열 명이 넘는지 안 넘는지, 짝수인지 홀수인지 등의 사소한 일이 중요한 작은 공동체였다. 


그 시절 우리는 매 학년 초가 되면 '가정환경 조사지'라는 것을 작성해야 했다. 가족 구성원, 이름, 나이, 직업 등을 적어 내는 것이었다. 나는 하얀 종이를 받아 들 때면 항상 칸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었다. 할머니와 나. 두 줄이면 충분했는데 비워진 칸들은 되려 내게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매년 반복하는 가정환경조사에서 나는 점점 움츠러들었다. 


이후 많은 시간을 부끄러움과 외로움 속에 살았지만 또렷이 기억나는 자랑스러운 사건이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일이다. 교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우리에게 선생님이 '가족신문 만들기'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와글와글 떠드는 아이들 속에서 선생님은 "부모님과 언니, 형, 동생 이야기를 담으면 돼요."라고 목소리 높여 말했다. 그 순간 내가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할머니 얘기 써도 되나요?" 


나는 열 명의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말수가 적고 쉽게 볼이 붉어지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갑자기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힘껏 목청을 높여 질문을 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물음 끝에는 울먹이는 목소리가 섞였다. 선생님의 대답은 기억나지도 않는다. 나에게는 그저 질문 자체가 필요했던 것 같다. '선생님, 저는 아빠 엄마와 같이 살지 않아요. 저는 할머니랑 살아요. 그래도 제가 떳떳해도 되는 거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 일을 소중하게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사진을 찍은 것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떤 시선에 맞서는 마음. 할머니에 대한 애정. 그 모든 것들을 표현하는 용기. 어린날의 당당함에 무척이나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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