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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Oct 23. 2021

할머니의 두 번째 육아

<할머니의 사계절> 




할머니는 50대에 다시 엄마가 되었다. 맏아들을 장가보내고 겨우 잠깐 숨을 돌리던 차에 돌도 안 된 아기를 품에 안게 됐다. 할머니는 자주 자신 없어했다. 많은 날들이 안온했지만 더러 찾아오는 불운에 더 크게 반응했다. 두 번째 하는 육아에 능숙함은 있어도 익숙함은 없었다. 


어릴 적 할머니가 만들어준 계란찜이 허벅지에 쏟아져 화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갓 완성된 계란찜은 스테인리스 대접에 담겨 있었고 할머니는 그 뜨거운 대접을 밥상으로 옮기다 그만 놓쳐 버렸다. 아빠 다리를 하고 앉은 내 허벅지에 계란찜이 덩어리째 쏟아졌다. 화장실로 달려가 찬물을 수도 없이 끼얹었다. 병원에서 타 온 약을 발라주며 할머니는 나보다 더 아파했다. 왼쪽 허벅지에 길게 생겼던 흉터는 몸이 자라며 옅어져 지금은 보이지도 않지만 놀란 할머니의 표정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할머니가 내게 매를 드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한창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자전거를 배우던 때가 있었다. 그날도 친구들과 장터에서 한대밖에 없는 자전거를 세 명이 번갈아가며 타고 있었는데 정신없이 놀다 보니 해가 지고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들어오라던 할머니 말이 기억났지만, 그날은 듣지 않았다. 노을 지는 여름밤 야트막한 내리막을 자전거로 달리는 순간이 무척이나 짜릿했던 것이다. 되려 같이 놀던 친구가 이제 들어가야 하지 않냐고 걱정을 해 주었는데, 그것도 잠깐 무시했다. 해가 지고 한참이 지나 집에 들어가니 할머니는 크게 화를 냈다. 처음 보는 할머니의 호되고 무서운 표정이었다. 이불 털 때 쓰는 기다랗고 튼튼한 종이 심지가 할머니 손에 들려 있었고, 나는 그 심지로 찰싹찰싹 팔뚝을 맞았다. 


할머니는 나를 키우며 속상한 일이 생기면 꼭 이렇게 말했다. 

"아(아이)는 할마이가 키우면 안 된다."

그 말을 들을 때면 어린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이제야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던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내가 잘못한 일인데, 우연히 일어난 사고일 뿐인데, 왜 할머니는 스스로를 탓했을까. 귀하고 애틋한 손녀에게 화살을 돌릴 수 없어서 할머니는 자신의 양육의 가치를 낮췄던 것이 아닐까. 본인도, 본인이 안고 있는 손녀도 선택할 수 없었던 삶에 대해 작게 원망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나는 '할머니가 키워주셨기 때문에' 잘 컸다. 할머니는 저고리의 깃을 다리듯이 정직하고 꼼꼼하게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했다. 할머니의 20년이 녹아있는 나는 그의 성품을 꼭 닮은 어른이 되었다. 표현은 잘 못하지만 진심은 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고, 늘 양보하면서 살라는 가르침 덕분에 좋은 사람들이 알아서 모여드는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 옛날 꼬맹이가 어느덧 훌쩍 자라 할머니는 더 이상 '아이는 부모가 키워야 돼'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번듯하게 잘 큰 손녀는 종종 할머니를 찾아가 같이 밥을 먹고, 티비를 보고, 함께 밭에 간다. 지금쯤이면 할머니도 생각이 바뀌었지 않을까. 할머니가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내가 손녀 참 잘 키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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