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이 만들어낼 새로운 영화
그곳은 영화관이라기보다 어떤 중간지대에 가까웠다. 불 꺼진 영화관에 앉아 빛나는 스크린을 바라보는 오늘의 관객과 VR 콘텐츠가 상용화된 미래의 관객을 양 끝 자리에 위치시킨다면 신촌 메가박스 comfort 4관의 관객들은 그 사이 중간쯤 서 있게 될 것이다.
입장과 동시에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4관의 좀비들이었다. VR은 VR을 체험하는 사람을 구경할 때 가장 재미있다더니 극장 안의 풍경이 그랬다. VR영화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영화를 예매하며 몇 가지 상상을 했는데, 모든 상상은 입구에서 객석을 점령한 좀비들을 마주하면서 전부 박살났다. 기존의 영화관 관객석 사이에 관람객들이 듬성듬성 서서(앉아 있는 것도 아님) 손바닥 만한 VR 장비(오큘러스 리프트)를 착용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영화가 시작했으나 제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처럼... 도우미들이 VR 장비 조작을 도와주어야 하는 탓에 관객석의 누군가가 관람을 마치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관람객이 곧바로 투입되는 식이었다. 나는 설레면서 동시에 좀 창피했다. 10분의 러닝타임 내내 누군가가 VR 장비를 뒤집어 쓴 나를 주시한다고 생각하니 과연 내가 영화에 몰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랜덤하게 정해진 나의 VR 도우미는 굉장히 친절한 분이셨고 덕분에 원활한 관람(덜 창피함)이 가능했다. 도우미는 내게 ‘눈앞에 개가 보이시나요?’ 라고 물었다. ‘네. 보여요.’ 내 대답과 함께 영화가 시작됐다.
‘순간이동’을 했다는 말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신촌 메가박스 comfort 4관에서 동두천 어딘가로. 바로 앞에 강아지가 있었고 나는 한적한 길 위에 서 있었으며 고개를 들면 하늘이 있었다. 내 발 밑과 바로 위 하늘에 있는 작은 블랙홀과(아마도 사각지대) 머리를 짓누르는 VR 장비의 무게, 그리고 4관 앞에서 줄을 서서 초조해했던 직전의 몇 가지 기억이 선명했지만 손쉽게 일정 수준 이상의 몰입 상태에 도달할 수 있었다. 강제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무자비한 몰입감이었다. ‘내가 보는 장면이 동두천 길거리일 뿐 내 몸은 신촌 메가박스 comfort 4관에 있다!’고 생각해보았지만 VR 장비는 내 시야를 완벽하게 사로잡았고, 덕분에 내가 실제로 발을 딛고 서있는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꽤 힘든 일이 되었다. 영화에 몰입하는 것 이외에 내게 주어진 선택지가 없었다. 영화가 시작된 다음, 처음 몇 분을 VR세계를 신기해 하는 데 썼다. 처음 몇 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실제와 같이 깔아 둔 동두천 길 한복판에 어정쩡하게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전후좌우에 늘어선 집, 차, 전봇대 등을 구경하는 것뿐이었다. 환경에 익숙해지고 나니 이곳이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던 여러 가지 기술적 한계들이 희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화질이나(내가 안경을 착용하고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색한 하늘, 화면의 왜곡 등이 세계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어 장애물로 여겨지지 않았다. 조악한 화질이나 어색한 영상, 어수선한 상영관 때문에 이어폰 너머로 들리는 소음이 영화 속 효과음과 혼동되는 것 등 몰입을 방해할 만한 몇 가지 요소가 있었으나, VR영화는 여태까지 영화관에서 보았던 어떤 긴장감 넘치는 영화들보다 몰입 상태에 도달하는 속도와 몰입도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관객은 기존의 영화를 관음하는 식으로 소비하지만 VR영화는 체험한다. 우리는 영화를 볼 때 영화 속 상황에 몰입함과 동시에 스스로가 존재하고 있는 공간이 신촌, 의정부, 또는 대학로의 영화관이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체감할 수 있다. 몰입감만큼이나 옆자리에 앉아있는 관객의 존재감이 크기 때문에 영화의 긴장이 떨어지면 주변의 작은 소음에도 몰입은 손쉽게 깨진다. 그러나 VR영화는 관객의 두 발을 감독이 의도한 자리에 묶어버린다. 영화의 모든 사건은 관객이 있는 장소에서 벌어지게 되고 심지어 어떤 VR영화는 관객을 진행되는 사건의 한가운데(공간적으로)에 몰아넣는다. 관객은 영화가 허락하기 전까지 현장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물론 장비를 벗어던지는 식으로 손쉽게 탈출할 수 있긴 함). 그렇다면 영화 ‘동두천’이 제공한 자리에 두 발이 묶여버린 관객은 이 서사 안에서 누구인가? 공중에 떠 있는 두 개의 눈알로 치환되는 관객은 극 속 여성을 살해한 살인자인가? 아니면 투명한 관찰자인가? 죽음의 현장의 중앙에 누구보다 가깝게 서 있는 관객은 후자보다는 전자에 가깝게 느껴진다. 실제로 관객은 동두천 어느 골목에 전봇대처럼 서서 걸어가는 여성의 뒷모습을 눈으로 따라가게 된다. 장면이 바뀌면서 점차 더 어둡고 인적 드문 골목길에 놓인다. 관객들은 이상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여성의 뒷모습을 좇는다(이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영락없는 살인자다. 그러나 후반부 어두운 터널 속에서 걸어 나오는 여성과 관객이 정면으로 마주할 때 영화는 관객에게 이 영화에서 너의 역할은 무엇인지 질문한다. 여성은 곧장 카메라를 통과하는데, 관객의 입장에서 이는 관객 자신을 통과한 것처럼 느껴진다. 극 속에서 관객의 자리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관객의 공간을 남겨두거나 관객이 인물과 충돌하도록 두지 않는다. 오히려 인물이 관객을 통과해버릴 때 관객은 자신의 형체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발밑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피가 이불 안에서 흘러나오는 마지막 장면에서, 여성이 죽었다는 생각이 들 때 열린 방문 너머로 발소리가 난다. 소리의 주인은 누구인가? 당연하게도 영화는 그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때 없어진 시체가 거울에서만 나타난다. 방 안의 시체,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많은 양의 피, 누군가 오는 소리, 방 중앙의 어중간한 높이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형체 없는 관객. 이들이 뒤엉켜 인물들과 그 관계를 헤집어 놓고 마치 VR처럼 현실과 비현실을 뒤섞어버린다.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계속해서 앞으로 흘러간다. 그것이 액자 구성이든 타임리프 구성이든 영화의 시간은 편집 프로그램의 타임라인을 따라 앞으로 이동한다. 영화관에 앉아있는 관객은 영화의 흐름을 조작할 수 없다. 놓친 장면은 재관람을 할 때나 다시 돌아온다. VR영화는 이 지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인간의 시야는 한정적이라서 등 뒤를 보는 동시에 앞을 볼 수 없다. 배우들이 내 뒤에서 멋진 액션을 펼친 들 내가 앞에 있는 풍경에 시선을 빼앗겨 뒤를 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동두천’에서 3D 음향을 사용해 계속해서 주의를 환기한 이유는 바로 그런 슬픈 일을 미리 방지하고자 함일 것이다. 일전에 대학로에서 ‘쉬어 매드니스’라는 제목의 연극을 본 일이 있다. 이 연극의 가장 큰 특징은 관객의 선택으로 범인을 잡을 수 있으며 이에 따라 결말이 바뀐다는 점이다. 관객이 보는 시야에 따라 영화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에 차이가 있거나, 이로 인해 결말 혹은 내용이 크게 달라진다면? 또는 누군가는 보았으나 누군가는 보지 못한 장면들이 나온다면? 영화 게시판에 ‘어떤 장면 다음에 곧바로 뒤를 돌아보아야지만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게시물이 꿀팁처럼 돌아다니게 될까? VR의 발전에 발맞춰 인간 역시 거듭되는 진화를 통해 시야각이 카멜레온만큼 늘어나지 않는 한 이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쉬어 매드니스’를 즐기는 관객들은 극의 모든 결말을 다 보기 위해 합심해서 범인을 고를 파티원을 구성해 단체 관람을 한다. 그들은 최소 3회 이상 극을 관람하는 셈이다. 관객들은 VR영화 한 편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관람하게 될까? 여건이 안 되는 관객들은 최상의 ‘가성비’를 위해 영화를 보기 전에 일종의 ‘영화 공략집’을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VR은 결국 영화관이라는 공간을 없애는데 일조하지 않을까? 영화관은 세상에 화면과 나(관객)만 존재하는 상황을 만들어주는 공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해왔는데, VR의 등장으로 장비만 착용하면 공간과 관계없이 깊은 몰입이 가능한 시대가 와버린 탓이다. 어쩌면 관객들은 VR영화를 구입해 게임처럼 즐기게 될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끝난 자리에서 포럼이 진행됐다. 포럼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영화와 게임이 각각 양쪽 끝에 존재하고 둘 사이에서 수없이 많은 콘텐츠가 탄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