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꿀혜윤 Aug 20. 2024

우는 날의 나는 여기에 있다.

가장 환하게 웃는 이가 가장 어둡게 아파본 사람이라 했다.

아주 어두운 곳에서 벗어나

밝고 환한 곳에서 다시 그 곳을 바라 볼 수 있는 

그런 구구절절한 시절을 보내고 나면

어둠 속에서 형채를 몰라 두려운 것들 모두

환해지고 나면 선명해지는 걸 안다.


지금의 어둠에서 어떻게든 기어 나와 

저기까지만 가면 이건 아무렇지 않아 진다는 걸 안다.


나에게 그건 친절이고 웃음이었다. 

이 아득함에도 꾸역꾸역 웃어 내면 마치 빛이 잡힐 듯 가까워진다.


그러다보면

아무도 나를 돕지 않고 

누구도 나의 편은 없고

도망갈 곳도 숨을 곳도 없고

이 것이 끝나지도 않을 것을 알 때에도


내가 나를 웃게 할 수 있어 졌다.


그러고 나면 또 반대로

너무 괴로워 온 종일을 쉬지 않고 울다가도

누구를 탓해야 하는지를 잃고

제일 편리한 나를 골라 잡는다. 


스스로를 가여워하고 동정하다 화가 나다가 

그런 것들을 다시 또 처음부터 반복한다.

그러다보면 형채를 몰라 두려웠던 것들 조차

어둠에 적응된 눈이 나름의 형채를 더듬어 안도에 이른다.


그렇게 더듬다보면

터널 어딘가에는 스위치가 있을 것이다.

꼭 환한 곳까지 나가지 않아도 안도할 수 있는 

그런 전환과 그런 다짐이 있다.


가끔 스위치를 켜고 

터널 나름의 구조와 규칙과 조화를 읽어가며 기쁘게 밖으로 나가기도 하며

모든 터널에는 스위치가 있다는 걸 믿는다.

끝내 닿은 희망과 긍정은 너무나 강력하다.  


그러니 가장 환하게 웃는 이가 가장 어둡게 아파본 이가 맞을 거다.

 

여전히 스위치가 있는 문조차 열 수 없는 그런 터널도 있다.

스위치가 있는 걸 알지만 도저히 문조차 더듬을 수 없는 아득한 캄캄함이 있다.

아직 그게 뭐였는지 내가 수도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사건 혹은 사고.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 마음이 놓였다.

이 캄캄함을 편히 부를 단어가 생겨서.


오래도록 트라우마 안의 스위치도 켜게 될 거라 믿었지만

그만한 고통과 상처는 인생의 어느 하나를 

고장내고 닫을만큼 강력하다는 걸 아주 오래 서성이다 알았다.

오랜만에 또 마음이 놓였다.

어떻게도 안되는 이대로가 나의 부족이 아니어서. 


오늘은 우는 날이다.

당황스러울 필요 없이 하루 한 켠에 종종 있는 시간이지만 나는 누구보다 늘 해맑다.

인스타도 스레드도 

아니 사실 나의 오프라인도 모두 

나는 여전히 밝지만


우는 날의 나는 여기에만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 때는 마스크 쓰는 사람이 없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