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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로운 영혼 Mar 24. 2020

엄마에 대한 단상 1

엄마가 된 후 엄마 이해하기 혹은 오해하기

   내가 엄마가 된 후 나의 엄마에 대한 감정들은 더욱 복잡해졌다. 아기를 낳고 기르기 전 까지는 조금 평균에서 벗어난 쿨하거나 혹은 자기애가 강한 엄마라고 생각했다. 그로 인해 받은 상처들은 여전히 아프다. 그런데  아이 둘을 기르면서 나는 그녀를, 마음이 아닌, 머리로는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기 싫지만 내가 그녀의 처지에 놓여보니 한 여자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살아온 그녀의 삶이 녹록지 않았으려니 추측해본다.


  20대까지 내 삶에 있어서 엄마라는 존재는 여느 평범한 엄마와 딸의 관계에서 처럼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아빠 사업이 힘들어지면서 엄마가 간병인 일을 하시게 되었던 그때는 아빠에 대한 원망이 컸다.  그리고 30대 초반에  아빠의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생명이 위독하실 때 엄마가 내린 결정에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고 실망을 넘어 슬펐다. 가정 형편은 허락지 않고 워낙에 머리를 크게 다치신 상황이라 의료진도 수술은 거의 의미가 없다고 했을 때 엄마는 아빠의 수술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때 나는 낮은 확률이라도 수술은 해 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고 돈이야 어떻게든 마련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아빠를 그냥 보내 드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우겨서 결국 수술을 했고 아빠는 30일 동안 중환자실에서 코마 상태로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되돌아 생각해 보면 엄마의 판단이 이성적이었다. 아빠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냥 보내드리는 게 나았던 걸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해 본다. 그런데 그 30일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 가족은 아빠를 아침저녁으로 면회하면서  천천히 이별을 준비할 수 있었다. 남은 가족들에겐 선물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비록 아빠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30일 동안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하루 두 번 허락된 짧은 면회시간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낸 가족들은 그때 좀 더 끈끈해졌다.


  그다음 해에 나는 미국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4년 차에 같이 일하는 상사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호흡곤란과 불면증에 시달렸고 병원까지 가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급기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극단적인 생각을 자세하게 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무서워졌다. 주변인에게 힘든 점도 토로했다. 그리고 엄마에게도 털어놨을 때 엄마의 대답은 "네가 잘 못해서 그렇지"였다. 아마도 그때였지 싶다. 내 마음이 엄마를 떠났던 때가... 그러고 보니 엄마는 항상 냉정했다. 냉정했다기 보다는 엄마에게서 공감을 받은 기억이 별로 없다. 그 이후로 나는 엄마에게 내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다.


  그리고 첫째 임신으로 입덧이 너무 심해 급기야는 피까지 토하는 걸 보고 남편은 한국에 잠시 다녀올 것을 권유했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도착한 친정에서 딸 입덧은 안중에도 없는 엄마 때문에 출국 며칠 전엔 동생 방에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입덧하는 내가 안쓰러워 음식을 해 주신다거나 이런 적이 없었다. 오히려 끼니때에 엄마 식사를 챙겨 드려야 했다 (그건 그럴 수 있다 쳤다. 임신 호르몬으로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언제 또 만나서 내가 엄마 식사를 챙겨 드릴 수 있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


  기침감기에 걸려 약은 못 먹으니 배, 도라지, 대추를 넣고 푹 끓여 먹으려고 감기에 같이 걸린 엄마와 함께 집 앞 마트에 갔을 때였다. 그런데 꼭 필요한 도라지가 없었다. 마트에서 배와 대추만 사와 나오는 길에 엄마는 내게 팥쥐 엄마가 콩쥐에게 말하듯 재래시장에 가서 도라지를 사 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같이 말벗 삼아 다녀오자는 제안에 엄마는 힘들다며 집으로 들어가셨다. 재래시장으로 가는 길이 어찌나 서운하던지 아직도 그 발걸음이 생생하다. 기침감기로 배는 계속 당기고 입덧으로 아직도 속은 울렁거리는데 집으로 돌아와 끓이는 것도 모두 내가 했던 기억이 있다. 그날 저녁, 남편과 화상통화를 하는데 급기야 나는 터지고 말았다. 내 기침감기가 걱정된 남편의 전화에 엄마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딸을 위해 당신이 장 봐오고 당신이 다 끓였다고 사위에게 자랑하듯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남편들더러 임신 기간 동안  아내에게 서운하게 한 건 평생을 간다고 잘하라고들 하는데 친정엄마 덕분에 남편이 나에게 잘 못 한 건 있는지 없는지 기억에도 없다.


  출국 며칠 전이 어버이날이었는데 선물은 뭐 해 줄거냐부터 시작해서 다른 자식들은 한 사람당 100만원씩 용돈도 꼬박꼬박 준다더라. 너희는 셋이니까 내가 300만원은 받아야겠다고 하시는데 우리 자매들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서운했을까? 그런 상황이 아닌 걸 아시면서도 용돈을 언급하시는 말씀에 서운함을 넘어 억울하기까지 했다. 동생은 본인도 모르게 부모님으로인해 20대 초반에 신용불량자가 되어 생활의 제약이 많았고 몇 년에 걸쳐 겨우 신용불량자에서 벗어나 본인 작업실을 꾸려나가고 있는데 말이다:



  첫째 출산을 앞두고 남편과 엄마에게 미국에서의 산후조리를 부탁드리기로 했다. 엄마도 흔쾌히 수락하셨는데 그 기간이 문제였다. 나는 한국에서의 일이 있던 터라 아무리 길어도 한 달 반 정도만 모시자고 했고 남편은 석 달은 모셔야 아기도 봐주시고 여행도 하시지 않겠냐고 나를 설득했다. 그렇게 엄마는 석 달 머무르실 예정으로 미국에 오셨는데 첫째가 예정보다 열흘을 빨리 나와서 엄마가 도착하시기 몇 시간 전 첫째가 세상에 나왔다. 남편은 첫째 출산까지 확인라고 엄마를 모시러 바로 공항으로 갔다. 짐 푸는 것도 도와드리고 장모님도 좀 쉬게 해 드린 후 저녁에 같이 올게 라며 나간 남편은 혼자 덩그러니 병실로 돌아왔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과 말투로 '장모님이 피곤하시다고 집에서 쉬신대'라고 하는데 그때의 서운함은 한국에서의 서운함과는 또 다른 서운함이었다. 아무리 비즈니스석으로 모셨다 해도 14시간 비행이 길긴 하지... 하면서도 그 묘한 감정은 아직도 선명하다. 그리고 다음 날 엄마는 손주를 보러 병원에 오셨다.


  산후조리를 위해 엄마가 미국에 머무시던 3개월은 나에게 지옥이었다. 사위와는 보름 만에 틀어졌고 나는 그 가운데에서 두 사람 비위를 맞추느라 산후조리는 고사하고 심리상담이 필요했다. 내가 살던 동부의 작은 시골마을은 한국과 달리 일반 마트 하나 가려고 해도 차를 타고 시속 70km로 10여분을 달려야 하고 한국 마트는 왕복 40분을 달려야 했다. 김치를 담아주시려는데 꽃소금이 없다며 저녁 7시에 사 오라고 하시기에 상황 설명을 해도 무조건 사오라시는 상황들이 몇 번 벌어졌다. 한국에서는 슬리퍼 신고 밤 10시에도 집 앞 마트에서 소금 하나 사 오는데 5분도 안 걸리지만 이 곳은 다른 상황임을 엄마는 이해하지 못하셨다. 처음에는 몇 번 움직이던 남편도 그 후엔 두손 두발 다 들고 포기했다.


  엄마와 좋은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은 욕심이었음을 엄마가 오시고 단 며칠 만에 깨달았다. 남편도 엄마랑 같이 나갔다 오면 혼이 빠진 사람처럼 힘들어했다. 그리고 내게 친엄마가 맞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엄마도 3개월 동안 나가지도 못 하고 하루 종일 집에 있는 일상이 답답하고 힘드셨을게다. 차를 운전하지 않으면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이 곳은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은 상황이다. 집 앞에만 나가면 다 있는 한국과 비교하면 이 곳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 밤이면 집 앞에 사슴이랑 너구리가 다니니 말 다 했다. 남편도 집에 오면 영 불편한 상황이 힘들었을게다. 두 사람은 엄마가 미국에 오시고 보름 정도 후부터 대면대면 지냈다. 3개월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사위가 없을 땐 내게 사위 험담을 하며 나에게 악담을 퍼부으셨다. 마지막엔 거의 말도 안 하고 지내던 두 사람은 엄마 출국 바로 전 날 극적인 화해를 했고 그 앞에서 나는 펑펑 울었다. 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가신 후 거의 1년은 남편과 이 문제로 사사건건 부딪히고 싸웠다.  

  

  그런 엄마가 지금은 편찮으시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건강한 모습으로 첫째를 봐주시러 오셨던 엄마가 지금은 기력도 없으시고 거동도 편치 않으시다. 그 후 3년이 지나고, 둘째 출산 후  산후조리를 도와주시러 오셨을 때 현저하게 체력이 떨어지셨던 걸 느꼈다. 그리고 지금은 더욱 가파르게 안 좋아지시는 게 보인다.


  그 간 엄마를 향한 내 감정들이 더욱 복잡해진 이유다. 엄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하는 질문이 끊임없이 들었다. 엄마는 살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하나 나열하면 다 끝도 없다. 지금 내 유년시절을 돌아보면 엄마의 그런 행동들이 나를 더욱 독립적인 개체로 키워낸 듯하다. 돌이켜보면 엄마는 엄마가 본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잘 못 된 것은 아니다. 엄마라고 무조건 희생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여전히 엄마와 나 사이의 질문들은 머리와 가슴속에서 정리되지 못 한 채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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