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을 좋아하는 인간이란 없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땐 햇살이 커튼 사이를 지나 침대 머리맡을 비추고 있었다.
햇살이 눈가에 찰랑여서 잠에서 깼나 보다.
목안이 깔끄러워서 메마른 신음을 내뱉다가 물을 마시고서야 목이 트였다.
라디에이터가 있는 곳에선 실내의 건조함이 유일한 단점이다.
물을 한차례 더 마시고 생수병에 수돗물을 채웠다.
핀란드에서부터 수돗물을 병에 담아서 마시고 있다.
동남아에서는 석회가 섞여 있어서 생수만을 마셔야 했고, 서울 아리수도 끓이거나 정수해야 하는데 이곳의 수돗물은 그대로 음용한다.
누가 알려준 것은 아니다.
인터넷에서 여행자들이 수돗물을 음용했다는 글을 보고 단순히 받아들였다.
사실 관계보다 믿음의 힘이 더 큰 탓인지 아직까진 별 탈이 없다.
물이 들어가자 몸 안의 장기도 이제야 깨어나 배고프다고 아우성친다.
2층 식당에서 크루아상과 커피, 요플레를 챙겨 먹고, 나올 때 청사과 하나를 베어 물었다.
이곳의 조식엔 빠지지 않고 요플레와 과일이 있어서 좋다.
베르겐으로 간다.
베르겐은 오슬로 이전 수도였고, 노르웨이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도시가 그리운 것은 아니었다.
트레킹을 연속하면서 자연의 매력에 푹 빠져있기 때문에 지나칠까도 생각했지만 다음날 페리를 통한 이동과 아름다운 드라이빙 경로를 여유롭게 즐기기 위해서는 베르겐에서 하루 머무는 것이 현명했다.
피오르드에 위치한 이 도시에는 현대식 건물이 즐비했던 오슬로와 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정도의 기대감은 있었다.
노르웨이의 도시를 거점으로 여행을 진행하고 싶다면 베르겐은 탁월한 위치다.
피오르드를 따라 명소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지도상에서 좌측부를 주로 여행하게 되는데 베르겐이 그 좌측부에서 위아래로 적당한 위치에 있다.
도로를 따라 베르겐 시가지로 들어서자 항구를 끼고 늘어선 목조 건물들이 있었고, 그 독특한 모양과 목조건물의 질감으로 인해 바이킹이 사는 곳에 온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 목조 건물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여행 전 노르웨이 도시를 떠올리면 기대하던 풍경이 이와 같았다.
그래 오슬로는 왠지 내겐 너무 세련되고 삭막한 북유럽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YMCA 호스텔에 짐을 풀고 끼니를 챙기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재스민 쌀을 넉넉한 물로 끓이면서 전날 어머님께서 주신 김과 스팸을 꺼냈다.
다른 여행자들도 각자 준비한 식재료로 요리를 하고 있었다.
파스타를 시도하는 사람이 가장 많았는데 올리브 오일과 양송이버섯까지 준비한 이들의 솜씨가 대단해 보였다.
나에게 주어진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씹으며 한 톨 남기지 않았다.
멀뚱히 앉아있다가 산책을 할 생각으로 라운지를 나서려는데 일본인 두 명이 다가와서 말을 건넨다.
의아한 눈으로 상대를 보다가 그동안 배운 몇 가지 일본어로 응대하니 까르르 웃는다.
일본인인 줄 알았다며 처음에 인사를 받아줄 때도 너무 능숙하게 일본어를 해서 깜빡 속았다고 한다.
이틀 전에 베르겐에 도착했다는 이들에게 산책을 위해 추천할만한 곳이 있을지 물으니 뒷동산에 올라가면 베르겐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어서 근사하다는 말에 길을 나섰다.
지나는 길의 풍경은 정겹고 활기찼다.
광활한 노르웨이를 가로지르는 동안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모두 이 도시에 모여있는 느낌이었다.
경사길에 접어든 이후로 상당한 거리를 걸었고 점차 산책의 개념을 벗어나고 있었는데 다행히 정상으로 가는 모노레일을 이용할 수 있었다.
장소와 상관없이 높은 곳에서 어떤 전경을 내려다본다는 것은 묘한 감동이 있다.
대단한 풍경은 아니지만 우리가 사는 형태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한눈에 담아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베르겐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도시였다.
발길이 닿는 대로 숙소 근처에 있는 작은 상점에 들어가서 아기자기한 소품을 구경했다.
주로 캠핑과 관련된 용품이 많았는데 머그컵과 장갑, 텀블러, 냄비 등 갖고 싶은 것 투성이었다.
코펠 세트와 침낭, 버너 정도만 있으면 첫날처럼 산에서 고립될 위기를 만나도 한 몸 건사할 수 있을 듯했다.
배낭여행을 하고 있는데도 침낭이나 텐트를 갖고 다니지 않는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여행 중 그런 장비가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지만 짐이라 여겼다.
노르웨이에서 그런 장비들이 만약을 대비한 것이 아니라 더 풍부한 경험을 위한 용도라는 것을 깨닫는다.
경험과 생각이 한정된 탓에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캠핑카나 텐트를 치고 야영하는 이들을 볼 때면 부럽다.
트레킹 장소마다 말도 안 되는 산기슭에 야영을 준비하고 누워서 하늘을 보는 이들에게 무한한 자유가 있었다.
나도 충분히 자유롭지만 잠자리까지도 벗어난 이들의 여행에는 비교할 수 없다.
숙소 앞 부두는 베르겐의 중심가다.
어둠이 내리면 부둣가에 가로등 불이 켜지고 그 조명 아래 어시장과 수상 레스토랑이 늘어선 모습이 낭만이었다.
맥주 한잔 할 생각으로 먹거리를 판매하는 붉은 천막들 틈으로 들어가서 앉았는데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받았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 큰 안경을 쓰고 머리를 묶은 청년이 환하게 웃고 있다.
숙소와 베르겐 산책 중에 일본인을 많이 본터라 이 청년 또한 일본인인가 싶어서 조심스럽게 "한국인이세요?"라고 물었다.
"네! 어시장에 들어올 때부터 한눈에 알았어요" 라며 또 웃는다.
이곳에서 같이 일하는 친구들이 모두 일본인이어서 자신을 일본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오랜만에 한국 사람을 만나서 반갑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일본인으로 오해받았나 보다.
그는 교환학생으로 와서 방학기간에 아르바이트 중이라고 했다.
즉석에서 해산물을 잡아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왠지 식욕이 돌아서 맥주와 함께 피시 앤 칩스를 시켰다.
상큼한 IPA맥주는 그 자체로 맛있었지만 튀겨진 대구살을 타르타르소스에 찍어 먹고 나서 마시면 더 좋았다.
감자튀김과 오징어링까지 전혀 모자람 없는 구성이었다.
베르겐 밤바다에 왁자지껄함과 해산물을 조리하면서 풍기는 냄새, 맛있는 음식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향긋한 맥주를 마저 비우고 나가면서 인사를 건네는데 청년이 다가와서 일 끝나고 맥주라도 한잔 어떠냐고 물었다.
숙소 YMCA가 바로 앞이기 때문에 일이 끝나고 다시 만나서 맥주를 마시며 막차 시간이 될 때까지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는 스키를 배우기 위해 노르웨이로 왔다.
반년 동안 그가 느낀 노르웨이는 놀라웠고 일부는 내가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것과 같았다.
학생으로서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노르웨이 문화를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면서 의외의 말을 했다.
"절대"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나라와 이곳의 차이라는 것이다.
그렇구나, 이 나라에는 "절대"라는 것이 없구나.
세계여행을 하는 사람 치고는 멀끔하다는 말을 또 들었다. 두 번째다.
굳이 꼬질꼬질할 필요는 없지만 나도 세계여행 시작 전 상상한 내 모습과 다르게 멀끔하다는 생각을 몇 번 했던 터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씻고, 옷은 틈날 때마다 손빨래하고 있어서 지저분할 이유는 없었다.
콧수염은 원체 잘 안 나서 3일에 한번 정도 면도를 해야 할 정도지만 그마저도 굳이 3일 동안 안 할 이유가 없어서 멀끔하다.
나는 늘 멀끔한 것에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에도 잠깐 집 밖으로 나갈 때면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기 일쑤였다.
고등학교 사물함에는 클렌징과 샴푸, 수건이 있었는데 요즘은 어떤지 몰라도 당시에 학교에서 씻는 학생은 반에 한두 명이 있을까 했다.
늘 멀끔하게 씻고 가지런히 머리를 넘긴 후 좋은 스킨 냄새를 풍기며 정장을 입고 출근하던 아버지를 보고 자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좋은 냄새와 깔끔한 인상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아버지는 4-5년을 중국에서 지내다 온 이후로 자연인이 됐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어째서 그렇게 햇볕에 탄 거야?"
"이 주일 정도 줄곧 걸어서 여행을 했거든. 여기저기. 배낭과 침낭을 짊어지고 말이야. 그래서 그을린 거야."
"어떤 곳?"
"가나자와에서 노트 반도를 한 바퀴 빙 돌았어. 나가타까지 갔었지."
"혼자서?"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여기저기서 어쩌다가 동행이 생기기도 했지만."
"로맨스는 없었어? 여행길에서 어쩌다가 여자와 알게 됐다든지."
"로맨스?" 하고 나는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이봐, 역시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군. 침낭을 짊어지고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르고 걸어 다니는 사람에게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로맨스가 생겨날 수 있단 말이야?"
"언제나 그렇게 혼자서 여행을 하는 거야?"
"그래"
"고독을 좋아해?" 하고 그녀는 턱을 괴고 말했다. "혼자서 여행하고,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 떨어져 앉아 강의를 듣는 게 좋아?"
"고독을 좋아하는 인간이란 없어.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을 뿐이지. 그런 짓을 해봐야 실망할 뿐이거든."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
맞다. 고독을 좋아하는 인간이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