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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휘케치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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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훈 Mar 04. 2022

[휘케치북] 22.03.03

추천곡과 더불어 소소한 일상과 생각을 담았습니다

‘What’s New? - New York Jazz Lounge’

‘I should care - Kaori Nakajima Quartet’


넉넉히 나가서 산책을 하고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싶어서 기어이 네시에 일어났습니다.

하루가 너무 짧고 세상은 아름다우니 잠을 네 시간 정도만 자고도 거뜬했으면 좋겠지만

늘 일어나는 것이 힘들고 잠이 부족한 탓에 적어도 여섯일곱 시간은 자야 하는 몸이라 슬프다는 생각을 하며 샤워를 하고 커피를 정성스레 내렸습니다.

텀블러를 손에 쥐고 걸어 나온 한강길에 밖으로 드러난 손도 귀도 시림이 없을 만큼 포근한 날이었습니다.

11도의 포근한 날, 다섯 시부터 노랗게 해가 기울고

겨울에 마른 잔디와 강아지풀, 갈대, 이름 모를 잡풀들이 연갈색의 몸을 그 햇볕에 드러낸 채

부드러운 황금빛으로 산들거리고 있었습니다.


동으로 또 서로 걷다가

그 길로 망원 한강의 스타벅스로 가서 빈자리에 앉았는데 운이 좋았는지 옆 창가에 앉은 사람이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더군요.

다섯 시 사십 분,

창밖에 해가 눈부시고

그 해가 강에 비추며 기다랗게 해에서 나에게까지 빛의 길을 내어 아름다웠습니다.

빛이 물결에 부서지고 찰랑이는 동안 하늘은 점차 노을로 물들어가니 시켜둔 샌드위치에 치즈가 다시 굳을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겠더군요.

이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서 행복하고

내 옆 창가에 앉은 사람이 커튼을 걷고 밖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어서 또 행복했습니다.

그러기도 잠시 직원이 창가로 다가와서 눈부시다는 이야기가 있다며 블라인드를 내렸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순간이었습니다.


해는 이제 성산대교 바로 위쪽까지 내려와서 주황빛이었고 그 위로 높고 넓은 하늘이 물들고 있었는데

창가에서 떨어진 사람들은 이제 블라인드의 높이만큼만 밖을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여섯 시 이십 분,

창에 바짝 붙지 않은 시야는 확장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하늘보다 강을 봐야 했는데 강이 흰색과 푸른색으로 뒤섞여 너울지고 있더군요.

어쩌면 아이슬란드 남부에서 본 그 강물이 시리게 푸르렀던 것은 

빙하에서 시작됐기 때문이 아니라 해가 뉘어감에 따라 반사되는 빛이 달라진 이유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빛이란 생각보다 더 크게 영향을 미치나 봅니다.


블라인드를 내려버린 직원에게 다가가서

이곳의 매력은 노을을 볼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이 오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라며 잠시 후에 다시 블라인드를 올려줄 수 있을지 물었습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다른 직원은 너무도 쉽게 올리셔도 된다고 답했지만 

그럼 내린 이유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싶어서 

해가 곧 성산대교에 걸쳐 가리고, 이내 땅 밑으로 내려간다는 것을 설명하며 그쯤에는 걷어줄 수 있는지 되물었습니다.

걷어 올린 블라인드가 다시 내려오면

그것을 다시 올리는 일이 이토록 힘든 것입니다.


글을 쓰고 강물을 바라보기를 반복하는 동안 해는 땅 밑으로 숨었고 

창가에 앉은 사람만이 창에 바짝 붙어서 세상을 넓게 보는 동안

직원이 다가와 내가 가리키는 쪽 세 개 블라인드를 가장 높은 곳까지 걷어 올렸습니다.

창밖을 볼 수 있는 모두가 탄성을 지르며 좋아하니

노을의 아름다움은 끝없이 넓고 높은 하늘에 있고 세상은 이토록 아름다운 것입니다. 


해는 땅 밑으로 숨은 듯 하지만

사실은 건물과 구릉 뒤편에 가린 채 분홍과 보라 주황 등의 빛으로 세상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영화 라라 랜드에 석양이 나오는 순간은 짧지만 그 영화를 떠올리면 석양을 생각합니다.

때로는 석양을 보면서 그 영화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석양으로 물든 세상에 조명이 들어오는 순간이 매우 강렬하게 남아있어서

점차 어두워지던 어느 순간에 일제히 가로수 조명이 켜지면 그런 영화와 같은 순간에 내가 사는 듯해 설렙니다.


해를 등진 모든 것들은 점차 어두워지며 윤곽이 선명해지고 

빛을 띤 것은 석양의 잔재와 지나다니는 차들의 불빛뿐입니다.


여섯 시 오십오 분

성산대교에 늘어선 가로수가 켜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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