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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알테의 수기
by 꽈백앨리 Aug 19. 2018

우리의 온기는 만리장성보다 강하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만리장성을 쌓는 자



생각해보면, 만리장성처럼 멍청한 방어책이 없다. 아무리 길어도 한 곳이 뚫리면 뚫리는 것이고 아무리 길어도 끝은 있으니 그 끝을 돌아가서 치면 되니까. 실지로 몽골 군대는 그렇게 중국을 무너뜨렸다. 교만한 자들의 갇힌 사고방식은 그런 블랙코미디로 참화를 야기하는 법이다. 인생을 살아갈 적에도 만리장성을 방어책으로 건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항시 스스로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안위를 위해 만리장성을 쌓는 자, 조롱받아 마땅하며 가혹한 패배와 치욕스러운 죽음이 가깝도다. 삶에 만리장성 따윈 무용지물을 넘어선 자멸책인 것이다.


문예지 Axt 17호에 실린 소설가 이응준의 4차원 에세이 <악당은 천사보다 연구할 가치가 있다> 중에서 일부 발췌. 이응준의 에세이를 좋아한다. 어쩐지 나와 결이 비슷하게 느껴져서? 그가 쓴 에세이에서 '만리장성'과 관련된 부분을 읽고 무릎을 탁 쳤다. 만리장성을 쌓는 자, 조롱받아 마땅하며 가혹한 패배와 치욕스러운 죽음이 가깝도다라니. 이 꼬인 시선과 위트 있는 말투, 아무나 갖출 수 있는 게 아니다. 암 그렇고 말고. 만리장성을 쌓아도 돌아오는 게 인생이라면, 만리장성을 쌓지 말아야 하나? 쌓을 수 있으면 쌓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완벽히 믿으면 안 된다는 얘기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면서 이 에세이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났다. 그리고 만리장성을 쌓되 믿지는 말자에서 생각은 한번 더 나아갔다. 만리장성을 쌓고 싶어도 쌓을 수 없는 인생도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 그 사각지대까지 말이다.


오늘도 열심히 만리장성을 쌓는 우리는 참으로 어리석게도 인간은 예측 불가능한 인생을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살곤 한다.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믿어버리고 만다. 이 만리장성이 (만리까지는 쌓지도 못하지만) 남은 내 인생을 보장해줄 거라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의 늪에 빠지기란 얼마나 쉬운가. 사업으로 승승장구하던 사람이 쫄딱 망해 거리에 나앉았다더라는 식의 이야기는 현실에도 많거니와 미디어에도 숱하게 다뤄졌다. 보증을 잘못 서서 온 집안에 빨간딱지가 붙는다든가, 가족 중 하나가 큰 병에 걸려서 병원비 때문에 가세가 기운다든가 하는 이야기들. 자본뿐만 아니다. 재해로, 사고로 뜻하지 않게 궁지에 몰린다. 그러고 보면 특별한 큰일 없이 인생을 균일하게 사는 것도 축복일 수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신세니까. 




뜨겁게, 행동하는 사람,

다니엘 블레이크.


다니엘 블레이크는 심장질환이 심해져 담당의로부터 일을 쉬라는 권고를 받는다. 일을 그만두고 고용청에 질병수당을 신청하지만 심사에서 떨어진다. 다니엘은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고 재심사를 요청했지만 이도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 고용청에서는 그가 구직할 수 있는 상태로 심사되었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수입이 없는 상태라 구직수당이라도 받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구직활동을 하지만 고용청에서 요구하는 구직활동 기준은 까다롭기만 하다. 평생 목수로 일해온 다니엘에게 온라인 행정처리는 낯설 뿐이다. 마우스나 키보드보다는 종이와 펜으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고용청은 구직활동까지 온라인으로 처리해 증명을 남기라고 하지만 다니엘은 수기로 쓴 이력서와 발품을 팔아 일할 곳을 찾아다닌다. 막상 면접 제의가 와도 질병 때문에 일할 수 없는 상태. 고용청에서도 구직활동을 증명할 자료가 부족하다며 수당을 줄 수 없다고 한다. 

의사는 살고 싶으면 일을 하지 말라고 하고 국가는 살고 싶으면 일을 하라고 하는 역설적인 상황. 원칙만 고수하는 고용청은 도통 말이 통하지 않고 수중에 돈은 점점 바닥을 보인다. 오랜 시간 아픈 아내를 간병하느라 자신의 몸을 챙기지 못했던 다니엘은 병을 얻고 일을 잃고 자존심까지 위협받는다. 수당을 받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하라는 고용청의 업무 방식에, 다니엘은 최후의 호소를 한다. 고용청 건물 외벽에 호소문을 쓴 것.


I, DANIEL BLAKE Demand my APPEAL DATE BEFORE I STARVE And Change the shit music on the phones!

“나, 다니엘 블레이크, 굶어 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놈의 구린 전화 대기음 좀 바꿔라!" 


행인들은 낙서를 쓴 그에게 박수와 갈채를 보낸다. 행인들의 환호가 감동적이지만 동시에 씁쓸하기도 하다. 최소한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그들은 알면서 묵인하거나 선뜻 나서지 않는다. 다니엘의 낙서 저항에 박수를 보낼 뿐. 



국가의 존재 이유 중 하나는 국민이 사람답게 살 권리를 보장해주는,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해주는 것일 게다. 특히 성실하고 선량하게 살아온 국민에게는 더더욱. 삶은 언제나 만리장성을 돌아서 오니까. 누구라도 그럴 수 있으니까.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궁지에 몰렸을 때 최후의 기댈 곳이 하나라도 있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다니엘은 자신이 힘든 상황에 놓였음에도 이웃에게 손을 내민 사람이다. 평생 성실하게 납세하며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했고 요행을 바라지 않고 정직하게 일해왔다. 그러나 그의 인생이 그가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어쩔 수 없이 늪으로 곤두박질칠 때 그는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했다. 케이티의 인생도 그렇다. 만리장성을 쌓아서 온갖 불행을 막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쌓아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만리장성을 미처 쌓을 겨를이 없는 사람도 있다. 케이티의 삶이 곤두박질칠 때 그녀를 보고 울어 준 사람은 다니엘뿐이다. 케이티는 자신을 도와준 다니엘에게 제 몫의 밥을 나눠주고 다니엘은 자신도 수입이 없는 상황에서 케이티 가족에게 돈을 빌려준다. 케이티의 삶이 벗어날 수 없는 늪에 빠지고 있을 때 그녀의 손을 잡아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용청에도 자비란 찾아볼 수 없었고 오직 다니엘만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준다. 



인간은 누구나 선택을 하고 산다. 순간의 선택들이 삶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꿔 놓기도 한다. 잘못된 선택인 걸 알았다면 그는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보잘것없는 우리는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 채 선택을 할 뿐. 




우리의 온기는 무엇보다 뜨겁다


다니엘은 고용청의 비위 맞추기를 거부하고, 외벽에 글씨를 칠해 경찰에 연행된 후 완전히 궁지에 몰린다. 집 안의 가구를 모두 팔아버리고 아내와의 추억이 남은 모빌 단 하나만 남겨둔다. 그의 도움을 받았던 케이티의 아이들이 그를 잊지 않고 찾아와 도움을 주는 장면은, 인간애가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삶이 바닥을 치고 있을 때 진정 필요한 것은 행정처리 보다 인정과 온기라는 걸 다시 깨닫게 해준다. 다니엘은 그 온기 덕분에 다시 용기를 낼 힘을 얻는다. 



질병 수당에 대한 고용청의 행정 상 착오가 있다는 항소를 내고 재심사 인터뷰를 할 기회를 얻은 다니엘은 역시나 종이에 연필로 쓴 호소문을 품에 넣어둔 채 숨을 거두고 만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그 정직하고 선량한 이름만 남긴 채. 그의 호소문은 장례식에서 케이티가 대신 읽는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의 점도 아닙니다. 나는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굽실대지 않고 이웃이 어려우면 기꺼이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나의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인생은 뭘까. 만리장성을 쌓는 우리를 비웃듯이 그 만리장성의 끝을 돌아오기도 하고 뛰어 넘어오기도 한다. 어렵게 쌓은 만리장성을 손쉽게 부숴버리기도 한다. 돈 때문에 자존심이 시험에 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누구나 사연이 있다. 그리고 누구나 삶이 파놓은 구렁텅이에 빠질 수도 있고. 그게 자신의 잘못이든 타인의 잘못이든 혹은 가혹한 운명의 잘못이든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 아침에 눈을 뜨니 그레고리 잠자처럼 벌레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었지만 누구도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상태로. 그렇게 '변신'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벌레이기 앞서 ‘나’ 임에도 누구도 ‘나’를 존중해주지 않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벌레가 되었음에도 나, 내게는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현대성이라는,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불안정성을 상징적으로 풀어낸 단편이다.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레 <변신>이 떠올랐다. 인간이 구축한 '현대성' 앞에 무너지는 존재 또한 결국은 인간이라는 점이 비슷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남은 내 인생, 예측할 수 없는 그 인생에 겁이 난다. 그러다가도 문득 살아갈 힘이 나는 것이다. 야속한 인생이 각박하게 굴어도, 실없는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래도 내게는 선량한 시민의식과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최소한의 자존심과 힘든 시기를 겪는 생명체에 나누어줄 온기가 있으니까. 다니엘 블레이크는 케이티에게도 그녀의 아이들에게도, 그리고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도 그것을 알려주고 떠났다. 최후에도 선한 마음과 온기를 간직하는 것이 인간다운 것임을. 만리장성을 쌓아도, 만리장성을 돌아오는 인생을 피하기 위해 국가 시스템에 기대어도 인생은 코웃음을 치며 돌아와 나를 치기도 한다. 믿을 것은 인간애뿐이라는 실없는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생각해보라, 이 복잡하고 숨 막히는 세상에서 우리가 버티며 살아가는 이유를. 





영화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들이 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국가의 역할인 복지와 그 복지의 사각지대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평생의 안위를 위해 만리장성을 쌓으며 그것을 어느새 믿고 있는 어리석은 나를 발견하게 했다. 얼어붙은 정신세계를 깨부수는 도끼의 역할은 책도 할 수 있지만 영화도 할 수 있다. 


요즘 국민연금이 화제다. 연금 고갈 시기는 생각보다 가까운 미래다. 게다가 더 단축될 수도 있다고 한다. 나의 노후는 과연 어떨지.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가 믿는 그 온기의 가능성을 과연 믿고 있을지 모르겠다.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는, 멍해지는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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