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립스틱 덕후의 후회

최효안 에세이 <내 안의 발작버튼>

by 최효안

중독자들은 언제나 변명과 자기기만에 능하다. 쇼핑중독자인 나 역시 그렇다. 얼마 전 분명 생활필수품이 아니면 당분간 쇼핑을 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건만, 무너졌다. '다짐은 무너지라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되뇌면서, 어느새 손은 빛의 속도로 장바구니도 거치지 않고 바로 결제버튼을 누르고 있다. 이번에 발작 버튼이 눌린 아이템은 립스틱. 그러면서 '여성에게 립스틱은 생활필수품'이라는 금시초문의 새로운 논리로 스스로를 기만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주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현재 가지고 있는 립스틱이 30개는 넘는다. (실제로 전부 세보지는 않았다. 세보면 훨씬 많을까 봐) 이것도 얼마 전 정말 오래된 립스틱은 버린 결과다. 당연히 온갖 색깔의 립스틱이 있다. 그러나 정말이지 신기하게도, 메이크업을 마무리하고 가장 마지막으로 입술에 바르려고만 하면 딱 맞는 립스틱이 없다. 여기서 '딱 맞는'이란, 그날 얼굴 전체 메이크업과도 어우러지면서, 그날 입는 옷의 컬러와도 매치되면서, 그날 입술 상태와도 맞으면서(입술이 건조할 때는 매트한 립스틱은 안되니까), 무엇보다 그날 나의 기분에 딱 떨어지는 색깔의 립스틱이어야 한다. 이렇게 조건이 많으니 당연히 '딱 맞는' 립스틱 찾기란, 대통령 선거 때 최적의 후보를 찾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이번에 주문한 립스틱이 도착했다. 쇼핑중독자들은 택배를 뜯을 때 도파민이 솟구친다. 립스틱 컬러를 어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거칠게 포장을 뜯는다. 어차피 립스틱은 실제로 내 입술에 발라봐야 정확한 발색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반품도 안 된다. 립스틱 뚜껑을 열 때가 도파민 폭발은 정점을 찍는다.


'아! 내가 생각한 컬러가 아니다!'


그러나 좌절은 없다.


"아직 바르지 않았으니 여기까지는 반품이 가능하다"라고,


나의 뇌 중 그나마 합리적 사고를 관장하는 부분이 명령한다.

그러나 나의 널뛰는 감정을 담당하는 뇌는 "립스틱은 보는 컬러와 발랐을 때 색깔이 정말 다르다"라고 맞받아친다.


두 뇌가 싸우는 와중에 나의 손이 먼저 반응한다.

이미 나는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고 있다. 이제는 정말 낙장불입.


바르는 순간,


'아 이 색깔은 아니다'


본능적으로 인지한다.


그러나 새로 산 립스틱은 반드시 며칠간은 꼭 바른다. 그날의 메이크업에도 옷에도 전혀 안 맞지만, 꿋꿋하게 바른다.


왜냐고? 발작버튼이 눌려서 결국 쇼핑해 버리고 만 충동적 자아에게 처절한 자기반성의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나라는 인간은 일단 행동하고, 바로 후회하고, 깊이 반성한다. 이 무한의 뫼비우스 띠가 나라는 인간의 본질이다.


인간의 본질은 잘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를 깨닫는 것만으로도 꽤 위안이 된다. 무엇이든 첫걸음은 앎에서 시작되니까.


나는 또 앞으로 며칠간 입술만 동동 뜬 느낌의 '슬링백 핑크'라는 이름의 립스틱을 바르고 다녀야 한다. 어떤 이들은 왜 한 겨울에 그렇게 쨍한 핑크 컬러의 입술로 내가 다니는지 당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그게 나라는 사람인 것을.


최효안 예술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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