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쿤스, 뱅크시; 예술가들이 자본주의를 해독하는 방식-
20세기를 대표하는 석학 중 한 명이자 우리에게는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의 저자로 잘 알려진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그의 또 다른 저서 『소유나 삶이냐(To Have or To be)』에서 인간의 기본적 생존양식을 ‘소유하는 존재양식’과 ‘존재하는 존재양식’으로 분류해 그 차이를 고찰했다. 프롬은 더 많은 사유재산을 지향하는 자본주의 문화 속에서 인간의 존재양식을 확정 짓는 것은 ‘내가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느냐’에 달렸다고 지적했다. 이는 ‘나’라는 주체는 ‘내가 가진 것’으로 형성되며 고로 나의 존재는 ‘소유할수록’ 분명해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소유의 개념은 단순히 물질적 재산뿐만이 아니라 유무형의 자본을 모두 아우른다. 가령 연구자의 연구실적이나 입사지원자가 채용을 위해 갖춘 이력 및 실적증명은 학습‧지식‧경험적 소유에 해당 된다. 그런데 소유한 것을 보장하거나 늘리기 위해서는 ‘소비’의 요구가 불가피하다. 연구자가 훌륭한 연구실적을 내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과 연구비의 할애가 필요하고, 입사 지원자가 취업에 필요한 요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한다. 하여 소유는 다른 말로 소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자본이 넉넉한 사람은 더 많이 소비하고 그 결과 더 많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는 반면 자본이 부족한 사람은 소비를 충분히 못하고 사회적 지위 상승도 요원해지는데 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가진 만큼, 소비하는 만큼 대접 받는다’고 말할 수 있겠다. 곧 부익부 빈익빈의 메커니즘이다.
이러한 현상은 점점 미술가의 이름값(자본)이 중요해 지는 미술계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오늘날 미술시장에서 경탄의 대상이 되는 미술가는 대중성과 유명세를 갖춘 자로서, 주식에 비유하자면 현재 주가가 높으며 앞으로도 꾸준한 상승세가 점쳐지는 미술가이다. 갤러리와 콜랙터는 이런 미술가의 작품을 주식 투자하듯 사들인다. 이렇게 해서 오른 작품 값은 미술가에게 공고한 지위를 보장하고 작품에 더욱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반면에 유명세가 없는 미술가는 아무리 독창성 있는 작품을 선보인다 하더라도 시장에 진입하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서 팝 아트의 선구자로 불리는 앤디 워홀(Andy Warhol)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의미심장하다. “최근 몇몇 회사에서 나의 ‘아우라’를 사려고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나의 작품은 원하지 않았다.”, “일단 유명해져라, 그러면 사람들은 당신이 똥을 싸도 박수를 쳐줄 것이다.”
현대미술계에서 앤디 워홀의 뒤를 잇는 가장 성공한 미술가로 꼽히는 제프 쿤스(Jeff koons)는 이러한 소비 자본주의 시대의 추이를 즉각적으로 읽고 이를 미술의 영역에서 누구보다도 탁월하게 반영하였다. 그는 소비상품 자체를 미술의 맥락으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미술가가 곧 작품이 되는, 즉 ‘상품적 가치로서’의 미술가의 지위를 획득함으로써 현존 미술가 중 작품 값을 가장 비싸게 받는 인물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유명세와 대중성을 확장시키는 전략으로 유명 할리우드 배우 이미지를 자신의 이미지로 ‘차용’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스타 이미지’를 부여하고 이것을 인기 및 돈과 성공적으로 연결시킨다. 또한 주변에 있는 대상을 가져와 ‘메이드 바이 제프 쿤스’ 의 상품으로 치환하고 그것을 미술의 반열로 올린다. 이러한 차용의 전략은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 즉 예술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예술지상주의에 반하여 장르간의 구분을 없애고 매체 간의 혼합을 꾀한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최근의 예를 보자면 지난 4월 프랑스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과 제프 쿤스의 콜라보레이션을 꼽을 수 있다. 일명 ‘마스터스 컬렉션’이라 불린 이 작업은 가방 중앙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티치아노, 루벤스, 고흐와 같은 거장들의 회화와 함께 작가 명을 표시해 놓았다. 그런데 가방의 하단에 루이비통 로고 이외에 제프 쿤스의 이니셜 J.K을 싸인처럼 박아 넣음으로써 그림의 원작자와는 상관없이 거장의 그림과 가방 모두 제프 쿤스를 표상하게 만들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이제 대중은 그의 작품을 쇼핑하러 갤러리가 아닌 백화점으로 가게 된 것이다.
한편 미술의 상업화와 권위를 모두 거부하며 미술시장과 미술계에 호기롭게 빅big 엿fuck을 날리는 이가 있다. ‘거리의 테러리스트’라고 불리는 영국의 그래피티 미술가 뱅크시이다. 그를 놓고 영국의 정부, 미술계, 대중들은 뜨겁게 논쟁 중이다. 그의 작품이 담고 있는 시사적인 사안, 체제 전복적인 주제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활동 자체가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다. 그래피티를 범법행위로 규정하고 규탄하려는 정부의 입장, 미학적 수준의 저하와 권위의 위협으로부터 고급미술의 위상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미술계의 입장, 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넓힌다는 뜻에서 그래피티를 환영하는 진보적 미술계의 입장, 그리고 미술을 쉽게 공짜로 즐길 수 있게 된 대중들 간의 입장이 서로 대치되면서 그의 활동을 반사회적 범법행위로 볼 것이냐 아니면 미술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가 첨예하게 충돌한다.
그래피티, 이것은 문화 파괴행위(vandalism)일까? 그저 벽에 낙서하는 장난질에 불과하다고 하기엔 뱅크시가 세상에 던지는 일침이 꽤나 날카롭다. 그는 그래피티를 통해 자본주의의 늪에 빠진 미술계와 소비 중심주의에 중독된 사람들을 비판하고 갤러리를 중심으로 미술과 비미술을 나누는 것을 비웃으며 미술의 본질을 다시 성찰할 것을 촉구한다. 그는 말한다. “도시 경영자 관리자들은 그래피티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이윤을 내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존재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소수의 부자들만이 전유하는 그들의 보물창고, 갤러리. 대중은 그저 이방인에 불과하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뱅크시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뱅크시라는 이름마저 그의 본명이 아니다. 그는 복면을 하고 어둑한 밤에 런던 거리를 쏘다니며 어느 집 담벼락에다가 몰래 그림을 그린 후 경찰의 추적을 피해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그의 존재가 공적으로 드러나는 날에는 거리 미술가로서의 생명은 끝난다. 앞서 살펴본 제프 쿤스가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려 한 것과는 정반대로 그는 익명성으로 자기를 보존한다. 아무런 금전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면서 그림을 그리는 뱅크시는 자신의 표상으로 쥐를 택했다. 그의 말대로 “쥐는 허가 없이 존재 한다. (...)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완전한 문명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놀랍게도 이 모든 특성은 어둠의 수호자 배트맨을 연상시킨다. 다음의 글은 영화 배트맨에 나오는 고담시의 경찰 고든의 독백이다. 여기서 우리는 딜레마에 빠진 고든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배트맨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겠지만 그는 범죄자고 나는 경찰이다. 그게 전부다. 하지만 (...) 배트맨은 그 나이 든 여인을 구했다. 그리고 고양이도 구했다. (...) 내 손안에 있는 이 쇳덩어가 어느 때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흥미롭게도 뱅크시를 체포해 법의 엄중함을 보여주고파 하는 브리스톨‧런던 시(뱅크시의 주요 미술활동 지역) 또한 고든 경감처럼 무거운 딜레마에 빠져있다. 뱅크시의 작품을 보기 위해 각지에서 찾아든 관광객들로 뜻하지 않게 많은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뱅크시의 미술에 대한 시민들의 호응이 뜨겁다. 거리의 테러리스트라고 불리는 뱅크시는 이처럼 모호하게도 시의 재정을 살찌우고 문화 인프라를 늘려 지역사회에 활력을 주며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와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으로 대변되는 영국 현대미술의 맥을 이어간다.
세계 유수의 미술관‧갤러리의 조명을 받으며 비싼 값에 얼굴을 파는 미술가 제프 쿤스와 으슥한 밤거리에서 달빛을 받아가며 그림을 그리는 복면 미술가 뱅스키. 제프 쿤스는 현 자본주의 체제의 선두에 서서 돈과 지위 명성을 다 잡고 미술시장과 미술계를 진두지휘하는 자신을 보라고 한다. 반면 뱅크시는 소비중심주의에 중독된 사람들과 시장 자본주의에 복무하는 미술계를 줄기차게 조롱하고 비판하며 오늘도 어디선가 한 밤 중의 게릴라 미술전을 펼친다. 우리는 이렇게 다른 두 미술가의 행보를 보고 있지만 한편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점점 더 중요해지는 미술가의 유명세와 대중성을 이들 속에서 동일하게 실감한다. 미술 작품의 대량생산이 가능해 짐에 따라 미술에서 상실된 ‘아우라’의 개념은 이제 작가의 스타성 이미지와 그것에 의존한 상품으로 바뀌거나, 은밀하고 유머러스한 영웅 신화로 대체되고 있다. 앞으로 어느 쪽이 미술계의 미래를 대표하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 글은 (주)동아에스앤씨와 과학기술인공제회(SEMA)에서 발행하는 저널 <행복한 과학기술인>( 2017년 가을호) 에 게재된 미술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