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목원

by 남숙

살다 살다 ’ 요년’이라는 소리를 다 들어본다. 나는 그저 약정만기날이 다가와 연장 시 필요한 서류를 안내했을 뿐이다. 이 많은 서류를 언제 준비하냐며 바쁜 본인을 귀찮게 한다며 짜증을 내더니 결국 분에 못 이긴 아주머니가 욕을 했다. 다른 욕은 한 번씩 들어봤지만 처음 들어본 단어에 신박함을 느끼면서도 기분이 나쁘다. 수화기 너머로 어렴풋이 욕지거리를 들은 옆자리 후배가 놀라 괜찮냐며 묻는다. 나는 그저 괜찮다 했다.


퇴근 후 도착한 이곳은 나의 마음 안정제. 푸른 수목원이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철길과 저수지 사이에 만들어진 이 작은 수목원에서 나는 나의 작고 큰 걱정거리와 스트레스를 풀어낸다. 철마다 피는 꽃과 시원하게 자란 메타세쿼이아 나무 사이를 걷다 보면 불안한 마음이 이내 진정된다. 수목원을 걷고 또 걸으며 나는 나를 다진다.


몇 해 전 회사 근처 작은 오피스텔에 살던 나는 천정부지로 오르는 집값에 떠밀리듯 이 동네로 이사를 왔다. 그런 이유에서 일까 도통 이 동네에 마음을 못 붙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길 마을버스를 놓쳐 역으로 급하게 걸어가던 나를 지도앱이 이곳으로 안내했다. 수목원 속 식물들 사이를 지나가는 동안 잠깐이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이유 없이 바쁜 나와는 달리 본인만의 시간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식물들을 보고 있으니 묘하게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이곳을 찾아 마음을 풀어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도 좋은 일로 마음이 너무 벅찰 때도 이곳에서 마음을 덜어내고 나의 모습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나는 수목원의 겨울을 좋아한다. 이곳의 겨울은 혹독하게 춥고 여름의 생기는 기억도 안 나게 쓸쓸해진다. 겨울 동안 수목원의 동. 식물들이 죽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자 저마다의 방법으로 추위를 견뎌낸다. 나는 함께 견뎌내는 이 시간들이 좋다. 봄이 되면 이내 다시 싹을 띄운다. 혹독한 계절을 보낸 후엔 반듯이 본인만의 색을 내보인다는 자연의 이치도 맘에 든다. 마음이 힘들 때면 수목원에서 배운 것을 떠올리며 곧 좋은 일이 생길 거라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다. 그럼 거짓말처럼 편안해진다.


수목원의 많은 동. 식물 중 논을 구경하는 것은 또 다른 나의 즐거움이다. 벼가 잘 자라게 하기 위하여 풀어놓은 생물들을 관찰하고 계절에 맞춰 조금씩 바뀌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나의 소소한 기쁨이다. 매일 조금씩 본인의 속도에 맞춰 자라나는 벼를 지켜보고 있으면 힐링이 된다. 화려한 꽃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지는 않지만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다 결국엔 큰 수확을 남긴다. 세상이 정해 놓은 시간에 쫓기듯 달리는 나와는 달리 자기만의 시간을 지키며 자라는 벼를 보며 나도 나의 시간을 찾으려 노력하고 여유로워 지기로 다짐한다.


일주일 후 약속한 시간을 한 시간이나 넘겨 아주머니가 도착했다. 욕한 걸 기억도 못하는지 서류 때느라 혼났다는 말과 함께 금리를 내려달라 한다. 나는 바로 거절했다. 고객님의 통화에서 다시 한번 욕을 듣는 다면 재연장은 없을 거라는 나의 협박성 멘트에 고객도 직원들도 모두 놀라 쳐다본다. 그래 나는 친절하지 않다. 실은 마음이 넓지도 않다. 어쩌겠냐 내가 이런 것을. 예쁘지 않아도 좋다. 그저 나의 모습으로 살고 싶다. 친절하고 속 넓은 척 연기를 멈추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제야 이곳이 내 자리인 것 같이 편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