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일상에서 흔하디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섬세한 감수성으로 다시 그려내는 사진가 구본창. 그의 50년 사진 인생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
12월 14일부터 이듬해 3월 10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회고전 <구본창의 항해>가 열립니다. 청소년기에 촬영한 '자화상'(1968)을 포함하면, 50여 년 사진 인생을 돌아보는 자리인데요. 작가에게 ‘회고전’이란 단어는 어떻게 다가오나요?
‘회고전’이라 쓰고, ‘행운’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50여 년 작업 궤적을 하나의 전시에 담아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곧 전시실에서 보시겠지만, 16편의 개인전을 동시에 개최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부담감이 상당했죠. 그런데도 저의 50년 아카이브를 정리할 수 있었던 건 <구본창의 항해>를 위해 애써준 분들 덕분입니다. 한편으로는 일기를 다시 쓰는 것 같은 기분도 들더군요. 살면서 큰 보람을 느낀 일로 기억될 거예요.
인터뷰 마지막에 드려야 할 짓궂은 질문을 꺼내볼게요. 타임라인을 돌아봤을 때 선생님께서는 어떤 작가였나요? ‘구본창은 ○○○한 작가다’처럼요!
누군가 대신 답해줘야 하는 질문 아닌가요?(웃음) 꼭 말해야 한다면, 남의 눈치를 안 본 작가? 그동안 여러 전시와 인터뷰를 통해 작업이 소개됐는데, 미사여구로 저를 꾸민 적은 없어요. 그저 외골수처럼 사진을 찍고, 결과물을 담백하게 공개했을 뿐. 그런 구본창이란 사람을 이해해 준 좋은 인연을 만났기에 작가 생활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맞아요. 과거 인터뷰를 다시 읽어보니 굉장히 진솔하시더라고요. 심지어 같은 질문에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답변이 달라지지 않아 놀랐습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다가 1980~1990년대에 기록한 영상을 발견했어요. 디지털로 변환하지 않은 비디오테이프인데,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다시 한번 봤어요. 다행히 엉뚱한 말은 안 했더군요. 인터뷰 시점이 달랐는데도 보태거나 뺀 말 역시 없었고요. 더욱이 얼마 전 사람들과 나눈 대화와 비슷해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웃음)
전시 제목이 ‘항해’입니다. 추측건대 대학생 시절 수평선을 바라보는 자신의 뒷모습에 언젠가 저 바다 너머로 향할 것이라는 다짐을 담은 것이 항해의 출발선인 듯해요. 선생님의 50년 여정은 어땠나요?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1985년, 급격하게 변한 서울 풍경이 낯설어 심리적으로 힘들었지만, 그 외에는 노력한 만큼 보답을 받았어요. 만약, ‘신대륙을 발견하고야 말겠다’, ‘특색 있는 예술가가 되겠다’ 같은 원대한 목표가 있었다면 언젠가 깊은 좌절감에 빠졌을지도 몰라요.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자고 다짐했기에 휘몰아치는 폭풍을 피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멋진 인연이 훌륭한 나침반 역할도 왕왕 해줬고요.
앞서 언급한 '자화상' 작업에 관해 더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대로 주어진 조건에 순응할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하던 때 촬영한 사진입니다. 미대가 아닌, 경영학과에 진학한 일이 영향을 미쳤을 거예요. 모범생이었으나 대학 생활은 만족스럽진 않았어요. 수평선을 바라보며 다른 나라에 대한 동경, 나아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이 싹텄습니다. 본디 저는 모험심과는 거리가 먼 소극적인 사람인데, ‘이거다’ 하고 결론 내린 일에는 욕심을 부렸어요. 어찌 보면 참 이율배반적이었네요.(웃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속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라는 구절을 좋아하신다고요. 냉철한 경영학도가 따스한 감성의 사진가로 삶의 방향을 바꾼 이유가 있을까요?
일흔 나이에 헤르만 헤세를 운운하는 게 감성적이지만,(웃음) 어렸을 때 혼자 있는 날이 많았어요. 게다가 내성적이어서 학교생활이 즐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물과 식물, 작은 물건들과 대화를 자주 나눴어요. 자연스레 애지중지하고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죠. 미술에 끌린 이유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제 성향을 숨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1960~1970년대만 하더라도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팽배했으니까요. 대학 졸업 후 들어간 회사에선 온종일 서류만 만졌어요. 결국, 탈출해야겠다는 결심에 이르렀습니다. 남의 시선을 계속 의식하고 이거다 싶은 일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면, 사진가 구본창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흥미롭게도 그렇게 흘러온 시간이 독일에서 나비효과를 일으켰어요.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애정의 눈길을 주고, 온기를 나누려 했던 일이 사진에 녹아들었나 봐요. 주변에서 잘한다고 칭찬할 정도로. 이후 자신감이 붙으면서 사진 찍는 일에 열정을 쏟을 수 있었습니다.
1984년엔 무작정 안드레 겔프케(Andre Gelpke)에게 연락하셨다고요.
함부르크에서 공부할 때 원인 모를 갈증이 있었습니다. 해답을 구하던 중 서점에서 우연히 그의 사진집을 봤어요. 단번에 ‘이 사람이다!’라는 느낌이 왔죠. 전화번호부에서 안드레 겔프케의 번호를 찾아 다짜고짜 전화를 걸었고, 한달음에 그가 있는 뒤셀도르프에 갔습니다. 그날 안드레 겔프케는 제 사진을 두고 “한국 학생인데, 네 냄새가 안 난다. 유럽 작가가 찍은 사진처럼 보인다"라는 말을 해줬어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오랫동안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처럼 스트레이트 하면서 조형적 아름다움이 묻어난 사진이 최고라 믿었는데…. 그를 만난 이후 제 이야기를 진솔하게 전달하는 것이 최선이라 판단했고, 함부르크에 돌아와 졸업 작품을 전면 수정했어요. 그렇게 탄생한 작업이 '1분간의 독백(One Minute Monologue)'이에요.
다시 전시 이야기로 돌아오면, <구본창의 항해>는 ‘모험의 여정’(1968~2004), ‘하나의 세계’(1993~2007), ‘영혼의 사원’(1998~2023)이라는 세 개의 소주제로 나뉘어 진행됩니다. 각 섹션의 주안점은 무엇일까요?
‘모험의 여정’은 귀국 후 혼란스러웠던 제 감정을 그려낸 작품들로 구성돼요. 거리를 돌아다니며 촬영한 스냅 사진도 있지만, 한계에 부딪혀 다양한 실험을 했던 작품들도 있어요. 예를 들어, 인화지에 흠집을 낸다거나, 인화지를 꿰맨다거나 등등‥. '탈의기'(1988)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셨으면 해요. 대상을 응시하는 태도와 사진 형식이 달라지는 변곡점 같은 작업이거든요. 한편, ‘하나의 세계’는 자연의 순리를 주제로 한 사진들이 주를 이룹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은 임종 직전의 아버지 모습을 그려낸 '숨'(1995)이에요. 마지막으로 ‘영혼의 사원’에선 유물처럼 역사를 간직한 사물을 대상으로 한 사진을 만나볼 수 있어요. 이는 본디 우리의 것이지만, 현재 우리가 마주할 수 없는 것들을 사진으로나마 제자리로 가져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전시장 속 관객들의 놀란 표정이 벌써 그려지는데요.
흔히 저더러 ‘백자와 비누 작가’라고 부르잖아요. 그중 '백자'(2004~) 작업은 우리가 잘 몰랐던 백자의 아름다움을 알릴 수 있어 개인적으로 의미가 큽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 작업은 다양한 실험을 거쳐 지금까지 왔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빈티지 프린트를 다시 끄집어낸 것도 그 과정을 보여주는 일환이에요. 인화지 색이 바래고, 일부가 찢어졌지만, 모두 사진의 매력 아닐까요?
구본창을 이야기할 때 늘 따라오는 전시가 <사진, 새 시좌>(1988)입니다. 선생님께서 기획한 전시는 사진이 미술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 전시를 기점으로 사진에 개념, 감정, 사회적 담론 및 쟁점 등이 녹아들었기 때문이죠. 이 대목에서 선생님께선 ‘사진’과 ‘미술’의 관계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1996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처음으로 기획한 국내 사진 단체전 <사진-새로운 시각>이 열렸습니다. 그때 사진가들이 감동했어요. 1970~1980년대 사진가는 예술가와 그 작품을 찍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드디어 국립현대미술관 문턱을 넘어섰으니 벅차오를 수밖에. <사진, 새 시좌>도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1988년 전시 이후 사진 전공자들의 졸전 스타일이 확 바뀌었으니까요. 당시 저는 사진과 미술을 나누지 않고 예술가의 한 사람이라고 저를 정의했습니다. 독일에선 수업 시간에 다양한 매체를 다뤘기에 사진과 미술이 달리 다가오지 않았거든요. 우리나라는 최근 들어 그림 그리는 작가들이 카메라를 이용하고, 사진을 전공한 작가들이 다른 매체를 선보이는 경향이 활발해진 것 같아요.
선생님의 작업은 현실과 현실 저 너머를 넘나드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탈'과 '비누' 등 시리즈는 대상에 대한 본질적인 궁금증을 유발하는데요. 현실(찰나)을 날카롭게 절단하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시공간을 넘나드는 존재로 탈바꿈하는 선생님만의 비결이 있나요?
언어로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사진 기술이 밑바탕에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탈'(1998, 2002~2009) 작업을 아웃 포커스(심도가 얕아 촬영 대상 이외에는 초점이 맞지 않음) 대신 팬 포커스(화면 모두 초점이 맞은 상태)로 찍었다면, 영혼을 보는 듯 멀어지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을 거예요. 사진 외적으로는 제 주장을 다른 사람한테 강요하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작품들도 한 발 뒤로 물러난 것처럼 표현된 것 같습니다. 마치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느낌이랄까요? 합리화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린 시절 경험이 묻어났을 거예요.
숨겨진 아름다움을 어떻게 발견하시나요? 이를 포착하는 건 타고나는 것일까요, 아니면 많이 보고, 많이 찍고, 많이 상상하면서 키울 수 있는 것일까요?
50% 이상은 타고난다고 봐요. 혹은 어렸을 때 개발하거나. 감성적인 기질을 뒤늦게 공부로 키우는 건 힘듭니다. 처음부터 DNA에 그런 기질이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초등학교 시절에 겪은 것들로 대부분 결정되는 듯해요. 여기에 성인이 돼 얻은 경험치와 지식이 더해지면 금상첨화고요. 글을 쓰는 사람도, 작곡하는 사람도 예전의 기억을 되씹어 창조한다고 하잖아요. 그만큼 어린 시절에 다양하게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진은 0과 1의 세상에 더 많이 머무르고, 사진을 보는 방식도 스마트폰 액정과 두 손가락(핀치 줌 pinch zoom)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카메라로 촬영하고 인화지에 프린트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작가로서 이러한 경향을 어떻게 보시나요?
여전히 저는 이미지를 인화지에 안착해 전시하는 것이 작업의 마무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디지털 공간에서 결과물을 만드는 사람에겐 인화지가 필수는 아닐 테지요. 다만,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 관점에선 굳이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구분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이번에 발표하는 'Incognito' 시리즈 일부는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입니다. 찰나를 포착하는 일이 사진가의 숙명인데, 그 순간에 맞는 장비를 선택해야죠. 그러나 스마트폰에 사진을 띄우는 사람을 작가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어요. 작가라면 공간이든, 아니면 최소한 모니터로든 사진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해야죠.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대화를 정리하는 질문을 드려볼게요. 작가 초년생부터 오늘날까지 선생님께서 믿는, 변하지 않는 ‘사진가의 진심’이란?
호기심을 갖고, 열린 마음으로 대상을 살펴보는 것.
[202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