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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희 Jul 27. 2024

다락방 밖의 미친 여자들

Who am I

의도치 않게 여성 예술가들의 서사를 자주 접하고 있다. 필명을 고민하던 시기에 만나 나의 또 다른 자아가 된 허난설헌에서 여성 작가의 대명사 버지니아 울프까지.

차마 떨칠 수 없는 정상성의 범주에서 맴돌며 자신의 고유성을 찾기 위해 분투했던 여성들의 이야기에 먹먹해지면서도 그것이 내 삶이 아닌 것에 안도를 느낀다.

그런데 오늘은 미칠 수밖에 없거나 미쳐야만 했던 그녀들의 삶 속에서 나는 나의 정상성을 의심해 본다.


영화 [The Hours]  캡쳐


아이들의 방학과 내 방학이 어긋나 7일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물론 아이들 없이 자유로운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돌봄 노동에 빚지지 않은 자유로운 시간은 흔치 않아 설렘이 컸다. 습관처럼 출근하던 이른 시간에 일어나 아이들의 아침을 준비하고 행복한 아침을 맞이하도록 예쁜 노래를 틀고서 아이들을 깨운다. 일하는 동안에는 해주지 못했던 아침밥을 직접 해 먹이고 질끈 묶은 머리로 엄마 없는 아침을 대변하던 딸의 머리를 정성 들여 빗어준다. 쑥스럽다고 거부하는 초등학교 3학년 아들과 처음 있는 엄마와의 등교에 흥겹기만 한 딸의 손을 잡고서 집에서 학교까지 짧은 외출을 다녀온다. 학교 앞에서 기분 좋게 손을 흔들고 집에 돌아온 시간은 여덟 시 30분.


침묵의 시간은 호화롭게 흐른다.


첫 날은 아이들과 헤어지자마자 카페로 달려갔다. 집에 있으면 못다 한 집안일이 눈에 밟혀 시간을 즐기지 못할 것 같아 내린 결정이다.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보고, 한 달째 읽고 있으나 통으로 집중할 시간이 없어 앞부분만 너절해졌던 책을 내쳐 읽는다. 유튜브와 예능, 인스타그램의 광고,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근사한 물건들, 그들을 누비는 시간마저 근사하다.


둘째 날은 비와 천둥을 뚫고 오랫동안 쓰지 못한 글을 쓰러 도서관으로 향한다. 조용히 흐르는 모차르트의 선율과 장마철 물기를 머금은 잎사귀들의 싱그러운 향기, 끈적해진 대기에 비가 불러온 시원한 바람의 물결이 어우러져 꿈을 꾸는 듯한 시간. 오랜만에 짧은 글을 썼고 아이들을 위한 질 좋은 중고책을 샀고, 서평을 남겨야만 하는 청소년 소설을 완독 했다. 책을 덮고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의미 있게 시간을 보냈다는 충만감이 온몸을 감싼다.


셋째 날은 구름 사이로 슬쩍 고개를 내민 태양에 감사하며 집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는다. 설거지에서 화장실 청소, 아이들 방정리까지 끝내고도 오전 11시가 채 되지 않는 시간. 평소에 잘 먹지 않던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 물고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아파트 정원을 내다본다.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을 계산한다. 맥주 한 잔의 취기가 가능한 시간. 우두두 흘러내리는 땀방울에 차가운 맥주가 더해지고 마음은 늘어져 구름처럼 몸을 누이고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본다.


맥주 한 잔에 가득해진 취기에 가만가만 나를 스쳐 지나간 여성 예술가들의 삶과 나의 삶이 겹쳐진다. 낮술 한 잔에 풀어져 대책 없이 감상적인 시간을 보내다가도 책을 읽고 서평을 쓰며, 마음에 차지 않는 글에 머리를 쥐어뜯고, 핸드폰 화면에 정신을 뺏겨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화장실을 청소하는 삶을 사는 사람, 나는 대체 누구일까? 하루의 어떤 장면에 진정한 내가 있는 걸까?


아이들을 돌보며 그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행복을 느끼는 나, 남편과의 실없는 농담에 삶의 자잘한 걱정을 잃고 한없이 풀어지는 나, 육아 중에 소리를 지르며 집 밖으로 달려 나가 또 다른 삶을 살고 싶은 나, 철학서를 찾아 읽고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나, 안온한 글 뒤에 숨어 진짜 내 모습을 숨기고 다른 이들의 서슬 퍼런 비판을 피하려는 나, 맥주 한 잔에는 어림도 없는 취기에 풀어져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나태한 나, 화장실 구석구석을 쓸고 닦으며 마지막 물기까지 훔치는 나, 온갖 아름다운 물건들에 마음을 뺏기고 욕망에 눈을 번득이는 나


 그 어느 하나에도 거짓은 없다.
모순적인 그 모든 여자가 모두 내 안에 있다.
정상성 뒤에 숨어
미쳐버린 민낯을 가리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선을 위해
위선을 부리며 연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 모든 순간에 행복과 권태를 느끼는
살아있는 여성으로서
우리는 존재한다.


소위 미친 여성 예술가로 불리는 이들의 삶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던 나날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 그녀들의 삶에서 나를 본다. 시간이 흐르고 내 안에 있던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되면 나는 또 누구를 위한 변명을 쓸 수 있을까? 어떤 이를 내 안에서 발견하게 될까? 그때까지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서 깜깜한 물 같은 시간 속을 헤쳐 나가야만 한다. 정상성이라는 범주 안에서 고유한 자아를 발현하는 것은 그래, 그런 균형 안에서 일 테니까. 위선이라 하기에는 모든 것이 진짜 나인 나는, 이제 다른 이들의 삶을 싸잡아 욕할 수 없다. 그 이들의 삶이 내 안에 있으므로 나는 조금 더 넓어졌으리라.


안정된 삶 속에서 거짓된 평화에 질식되어 아이들을 버리고 이국의 삶으로 도망치듯 떠나는 여성의 모습을,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성의 모습을 완전한 타인이 아니라고 여기는 나는 위험한 상태인가? 미친 여자들의 삶을 내 안에서 발견하는 것은 이름 붙이기의 한 과정이다. 나도 모르던 나의 모습에 이름을 붙이고 그를 의식 위로 끌어올리며 새로운 나를 발견한다. 그만큼 나는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나의 일부를 밝히고 진실성에 위로받는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그 어떤 모습도 긍정할 수 있는 힘이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그러니 나는 기꺼이 미쳐보리라.
꺼지지 않는 내면의 불꽃에 기대어
집시처럼 춤추고
때로 짐승처럼 표효하며
성모처럼 아이를 안아 보리라.

그 모든 나를 탓하지 않고
섣불리 정의 내리지 않고
현실에 쉽게 타협하지 않는
최후의 내 편이 되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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