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가 역설을 다루는 세 가지 방식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은 전송이 아니라 현상이다. 일방향으로 정직하게 도착한 편지, 훼손되지 않은 메시지란 없다. 예를 들어, 오늘날 소비자는 브랜드가 자신을 속일 수 있다 여긴다. 브랜드는 소비자가 그리 생각할 것을 짐작하고 있다. 그리고 소비자는, 브랜드가 짐작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선수들끼리 하는 게임이다. 누구나 이해한다, 시장이란 규칙에 따라 돌아가는 보드게임판과 같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속고 속임으로써 시장은 굴러간다. 그 사이에서 비틀리고 찢기다가 때로는 과장되거나 오해받기 십상인 것이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이다. 거기서 우리는 브랜드가 발송한 메시지가 소비자에게 직선적으로 가닿을 것이라 결코 기대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모든 커뮤니케이션의 역경을 뚫고 브랜드가 살아남으면 그 뒤로 어떤 구조가 생겨난다. 여기서 구조란 브랜드가 시장과 소통하는 방법들이 만들어내는 규칙의 집합을 뜻한다. 규칙은 기획의 결과이거나 자연스런 습관 또는 둘 다일수도 있다. 규칙의 일관성이 자리잡으면 정체성이 형성되고 소비자가 브랜드를 알아보게 된다.
이 구조를 "직접적으로" 의식하고 정교하게 조율하는 인상적인 사례가 바로 무인양품이다.
무인양품(無印良品, MUJI)은 1980년, 일본 대형 슈퍼마켓인 세이유의 PB 브랜드로 출발했다. 당시 일본은 버블경제가 한창이었다. '브랜드'가 중요한 시대였다. 브랜드가 유명하고 제품에 잘 드러나야 팔렸다. 그런데 뜬금없이 '브랜드 없음'을 차별화 포인트로 내세우며 나타났던 것이다.
이와 같은 태생에 걸맞게 무인양품은 일본식 절제의 미학, 미니멀리즘, 실용주의 브랜드로 인식된다. 그런데 정작 무인양품 자신은 이러한 규정들을 경계한다. 한 번도 스타일을 만들고자 한 적이 없다 역설한다. 스타일로서의 미니멀리즘이 아니라 부정한다. 대신 공기같은 제품들을 만든다 말한다. 애플처럼 브랜드가 소비자를 지배하는 케이스와는 다르다 말한다. 심플함이 곧 무인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인양품의 지향점은 무엇인가?
무인양품은 브랜드가 아닙니다. 무인양품은 개성이나 유행을 상품으로 만들지 않으며, 상표의 인기를 가격에 반영하지 않습니다. (···) 무인양품이 목표로 하는 것은 '이것이 좋다'가 아니라 '이것으로 충분하다'라는 이성적인 만족감을 고객에게 주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가 아니라 '로'인 것입니다.
무인양품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사상'을 강조한다. 무인양품은 소비사회의 안티테제이기에 시공간을 뛰어넘는 제품의 본질, 생활의 본질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특한 브랜드 개념화가 무인양품만의 매력 포인트임은 분명해 보인다. "무인양품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은 주로 브랜드 철학과 디자인에서 기인합니다. 무인양품은 사상을 정립하고 홍보하는 방식이 워낙 독보적이다 보니 이를 추종하는 팬도 많죠."
흥미로운 사실은 무인양품의 무인(無印), 즉 브랜드 없음의 선언이 결코 '무'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두가 알듯이 무인양품은 브랜드 없음을 주장함으로써 오히려 브랜드를 공고히 했고 프리미엄 이미지까지 얻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당연하게 여겨지겠지만,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획득하는 역설적 논리 구조를 다시 한번 눈여겨보자. 무인양품의 커뮤니케이션 전술은 우아한 백조가 수면 아래에서는 끊임없이 발을 젓는 일, 또는 모범생이 시험 당일 어제 공부 하나도 안 했다며 겸양을 연기하는 일과도 같은 것일까? 실제로 무인양품은 "이것으로 충분한" 제품의 본질을 발견하고 설계하기 위해 엄청난 심혈을 기울인다. 한 직원의 인터뷰를 살펴보자.
무인양품의 선반을 보면 이런 단순한 선반 한 개를 만드는 데 2~3년이 걸립니다. (···) 궁극의 선반이 필요하지, 다른 기능을 갖춘 선반은 필요 없다고 하더군요. (···) 그래서 제가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선반을 봤습니다. 그렇게 고민 끝에 나온 게 확장이 가능한 선반입니다.
하지만 무인양품을 (다소 긍정적인 의미에서) 겉과 속이 다른 브랜드로 이해하는 일은 사태를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무인양품은 없음의 배후에서 있음을 위해 몰래 애쓰는 것이 아니다. 즉, 없음의 반대편에 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인양품의 노력들은 "무를 설계하는 일"이라고 보아야 정확하다. 안과 바깥이 구분되지 않는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없음의 사상을 따라가기 때문에 있음이 나오는 것이고, 이 있음을 좇고 있기에 없음을 선언할 수 있다. 현학적 말장난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역설 안에, 무인양품이라는 브랜드가 소비자의 인식 속에서 작동하는 구조가 들어 있다.
우리는 흔히 무인양품에서 미니멀리즘을 발견한다. 이러한 호명이 부정확하다고 지적할 수 있다. 미니멀리즘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서구적 모더니즘의 귀결이다. 미니멀리즘은 덜어냄으로써 좋음과 완성을 추구하지만, 무인양품의 덜어냄은 완전함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무인양품의 아트 디렉터 하라 켄야에 따르면, 무인양품은 빈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그 덧없음과 불완전성 속에서 "이것으로 충분한" 아름다움을 찾으려 한다는 차별성이 있다.
하지만 당위와 사실을 구분하자.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무인양품의 사상과 지향점은 분명 미니멀리즘과 다른 삶의 태도를 표방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당위와 이념의 문제이다. 사실의 영역, 즉 브랜드와 소비자가 뒤섞이는 시장의 영역에서도 실제로 그렇게 작동하고 있을까? 무인양품이라는 작가의 사상은 무인양품 전반에 반영되어 있을 것이고 소비자는 그러한 커뮤니케이션 메시지를 받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비틀림과 굴절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브랜드의 실제 작동 방식은 바로 그 지점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무인양품에서 미니멀리즘의 매혹을 발견하는 일관된 오독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 둘의 공통점은 비워냄이다. 여기서 비워냄의 신화적 원형인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를 떠올려볼 수 있다. 판도라가 상자를 열자 그 속에 있던 모든 종류의 재앙들이 세상으로 빠져나간다. 하지만 끝까지 바닥에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희망이었다. 이 이야기는 모든 비워냄 중에도 끝끝내 남아있는 잔여물의 존재를 증언한다. 완전한 소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말은 모두 거짓말이다"라는 명제의 불가능성과도 같다. 이 명제 자체는 진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분홍색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들은 이의 머릿속에 분홍색 코끼리가 남는다. 비워내려 해도 남는 잔여물, 거기에 환영들이 엉겨붙어 매혹을 낳는다.
무인양품이 아무리 비워냄을 선언하고 없음을 선언하더라도, 그 외침 뒤에는 항상 잔여물이 남는다. 그리고 이 잔여물이 무인양품을 매혹적인 것으로 만든다. 미니멀리즘보다 "더 나아가" 비움을 실천하려 할 때 잔여물의 존재는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째서 잔여물은 매혹적인가?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대상 a (object petit a)' 개념이 좋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대상 a는 우리의 욕망을 완벽히 충족시켜줄 수 있으리라 믿는 가상적 대상 A(대문자)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이다. 애초에 그런 가상적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소문자와 같은 작은 파편들로부터 숨겨진 완전성을 추론하려 한다. 예술, 사랑, 종교적 황홀경 같은 것들이 실로 그렇지 않은가? 만약 내게 예술 작품의 탁월한 감상능력이 있다면 영혼의 격이 올라갈 것 같고, 뭇 시인과 화가들이 삶을 불태워야만 했던 그 신화적인 경지를 엿볼 수 있을듯 하다. 어쨌든 예술에는 "눈앞에 보이는 것(소문자 a) 이상의 거대한 무엇(대문자 A)"이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이유로 대상 a는 '욕망의 원인'이라고 불린다. 거대한 무언가의 파편이라는 상상력은 욕망을 유인하여 끊임없이 움직이도록 만든다. 그런데 욕망의 원인은 욕망의 대상과는 다르다. 욕망의 대상은 내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것이지만, 정작 실제로 손에 닿는 순간 내가 원하는 것이 이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흔히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반면 욕망의 원인은 어떤 말로 가리킬 수는 있지만 정확하지 않는 모호한 경계에 있다. 예술이나 사랑처럼 말이다. 절제, 선(選), 미니멀리즘, 실용주의, 동양적 정신 등도 마찬가지이다.
무인양품이 추구하는 바를 "문자 그대로" 읽는다면 그것은 공(空) 안에서 욕망을 소멸시키거나 흩어내거나 가둬두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있는 곳은 시장이다. 욕망의 순환이 체제를 지탱하는 자본주의의 한복판이다. 그리고 심지어 무인양품은 일상적 소비재를 판매한다. 따라서 무인양품의 '진의'야 어쨌든 이것으로 충분하다, 라는 무인양품의 선언은 사실 욕망의 미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무언가 다르게 소비한다는 느낌(혹은 착각) 속에서 욕망이 계속해서 순환한다.
여기서 무인양품에 재미있는 모순이 있다. 무인양품의 상품들은 이것으로 충분함을 추구하기에 화려하거나 거추장스럽지 않다. 제품에 붙은 설명들도 읽기 쉽고 충실하다. 덕분에 범용성과 모듈적 디자인을 취한다. 그래서 충분한 것들을 계속해서 구매하게 된다. 일단 욕실에 무인양품의 심플한 반투명 용기가 들어오면 그 외 다른 것을 구매해서 깔맞춤 하기는 쉽지 않다. 락인(lock-in) 효과가 일어난다. 그리고 무인양품의 사업 영역이 계속해서 확장된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건축과 호텔 사업까지도 말이다.
충분함은 어디까지가 충분한 것일까? 무인양품이 그린 얇고 아름다운 선을 따라가다 보면 충분함을 향한 욕망은 모세혈관처럼 촘촘하게 일상 곳곳으로 이어지며 달려나간다. 그러므로 비움이라는 당위적 철학의 선언은 시장이라는 사실의 일부분이 된다. 겉감과 안감을 분리하지 않고 연결하며 긴장 상태를 운동 속에서 유지하는 영리한 커뮤니케이션이다.
한국의 소비자에게 '브랜드 없음 브랜딩'의 또 다른 대표 주자는 바로 노브랜드(No Brand)일 것이다. 노브랜드의 구호는 이렇다. "브랜드가 아니다, 소비자다." 그런데 노브랜드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무인양품과 상이하다. 노브랜드는 브랜드 없음의 역설을 숨김 없이, 즉각적으로 소비한다. 역설의 긴장 해소 효과를 커뮤니케이션의 동력으로 삼았다.
노브랜드의 초창기 주요 메시지는 브랜드 값이 없기에 저렴한 가격에 상품을 판매한다는 것이었다. 즉, 합리적 소비자라는 자아를 판매했다. 무인양품도 수십 년 전 비슷한 표어를 썼다. "이유가 있어서 싸다." 그런데 무인양품은 '이유'의 설명에 공을 들였다. 흠이 있어 폐기 예정인 표고버섯을 공수해 판매했다. 포장을 간략화하며 액체를 담는 용기를 통일했다. 티슈는 갈색 종이를 이용해 표백 공정을 줄였다. 역설의 해소가 아니라 역설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득해낸 것이다.
노브랜드가 위치한 배경은 무인양품의 것과는 다르다. 노브랜드는 '없음'은 처음부터 이마트의 '있음' 안에 있었다. 애초에 대형 유통 채널이라는, 빠른 회전의 이미 존재하는 시장에서 차별화하기 위해 브랜드 없음의 구호를 빌려온 것 뿐이다. 브랜드 값을 없애서 싸게 팔겠다는 대형 채널의 전략적 포지셔닝이기에 이것을 역설의 실패로 이해해선 안 된다. 브랜드의 맥락이 다르기에 역설이라는 장치를 활용하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또 다른 사례로서 다이소를 생각해보자. 다이소는 역설의 질문 자체를 제거한다. 즉, 왜 이 가격인가 하는 질문 자체를 제거한다. 창업주 박정부 회장의 저서 제목이 "천 원을 경영하라"라는 사실을 상기하자. 다분히 전략적인 선택이다. 의도적으로 완전한 평면을 만들었다. 무인양품은 왜 이 소재인가, 왜 이 형태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역설을 유지하고 그 역설에서 힘을 얻는다. 노브랜드는 역설을 만들자마자 합리적 가격으로 바로 해소한다. 그 과정에서 해소된 브랜드의 자리에 여전히 의존한다. 그러나 소비자는 다이소가 다이소라서 가는 것이 아니다. 브랜드와 무관하게, 정말로 저렴하기 때문이다.
다만, 만성적 불경기 속에서 다이소는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약품과 화장품의 입점에서 볼 수 있듯이, 질문이 제거된 평평한 땅 위에 조금씩 브랜드를 쌓아올리며 입체성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 구조는 역설과는 다르다. 평면을 쌓아올리면서 생긴 중층의 구조이다. 다이소라는 브랜드에서 역설이 감지되는 순간, 품질을 말하고 브랜드를 말하는 순간 무인양품이나 노브랜드와 경쟁해야 한다.
정리해보자. 브랜드에서 발화된 메시지는 더 이상 브랜드 자신의 것도 소비자의 것도 아니다. 때문에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은 어떤 식으로든 왜곡되는 것이 당연하다. 역설이란 그 비틀림의 간격을 오히려 브랜드 정체성 강화에 사용하는 테크닉이다. 그리고 역설을 활용하는 세 가지 방식을 살펴봤다. 무인양품은 역설을 유지한다. 노브랜드는 역설을 소비한다. 다이소는 역설을 제거한다.
물론 역설이 브랜드 전략의 전부는 아니다. 브랜드가 취할 수 있는 다양한 제스처가 존재한다. 하지만 역설이 흥미로운 까닭은 그것이 유독 인간의 욕망을 굉장히 정확하게 파악하고 겨냥하기 때문이다. 비워냄의 제스처 뒤에 작은 조각(우리가 '대상 a'라는 이름으로 지칭했던 것)을 남겨두고 인간의 욕망이 끊임없이 흐르게 한다. 무인양품은 역설을 유지하며 계속해서 얇은 줄 위를 걷고 있는 것이고, 노브랜드는 역설의 순간적 해소를 통해 치열한 유통 시장에서 욕망을 함께 승화시키며, 다이소는 질문을 의도적으로 지움으로써 욕망이 저도 모르는 새 길을 잃게 한다. (다이소에 막상 갔을 때 뭘 사야 할 지 잊어버리고 예상치도 못했던 물건들을 가득 사서 나오는 일을 생각해보라.)
결국 브랜드와 커뮤니케이션하는 일이란 끊임없는 욕망을 주고 받는 일 그 자체이다. 적어도 욕망의 '핸들링'에 관한 한 럭셔리 브랜드는 좀 더 하수다. 물론 럭셔리 브랜드는 희소성과 상징성을 통해 욕망을 흐르게 하지만, 가령 명품 가방이라는 대상을 너무 빠르고 분명하게 앞에 내세운다. 그래서 뻔하다. 비유하건대, 그리스도교의 신이 결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일과 우상숭배를 금지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무인양품의 생각과 말』
『무인양품은 90%가 구조다』
『매거진 B No 53 무인양품(MUJI)』
『천 원을 경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