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의 날씨는 참 변덕스럽다. 시카고에 머물렀던 올해 여름을 보면 햇빛이 강하게 비쳐 덥다가도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몰아친다. 호수 바로 옆에 위치하지만 어떤 날은 매우 건조하고 어떤 날은 한국의 장마처럼 습하다.
1871년 시카고의 날씨는 대체적으로 매우 건조하고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고 한다. 7월 4일부터 10월 9일까지 강수량이 불과 25mm였다고 하니 얼마나 건조했을지 짐작이 간다. 도시로 승격된 후 급격히 팽창했던 시카고의 인프라가 대화재로 거의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 화재로 인해 1871년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건축의 도시, 다양성의 도시인 시카고의 모든 시작점이 되었다.
대화재 이전 오리어리 부부의 집 (위키피디아)
1871년 10월 8일 밤 9시경 시카고 서남쪽에 위치한 드코븐 스트릿 (DeKoven Street)에 오리어리 (O'Leary) 부부가 살고 있던 집 마구간에서 불씨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집은 시카고의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화재가 난 원인에 대해서는 오리어리 부인이 소젖을 짜다가 소가 등불을 뒷발로 차는 바람에 불이 났다는 둥, 우유 도둑이 몰래 우유를 훔치다가 등불이 떨어졌다는 둥, 술 취한 동네 사람들이 오리어리 부부의 마구간에서 몰래 포커게임을 하다가 등불을 떨어뜨려 화재가 시작되었다는 둥 여러 소문이 무성했다.
오리어리 부인은 아일랜드에서 이주한 이민자이자 가톨릭 신자였는데, 그 당시 미국인들은 아일랜드인과 천주교인을 싫어했다. 한 신문 기자가 오리어리 부인이 소젖을 짜는 동안 소가 등불을 뒷발로 찼다는 기사를 썼고 이에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 여성이 소를 잘못 관리한 탓이라고 여겼다. 이 신문 기자는 나중에 가짜 뉴스였다는 사실을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녀사냥은 계속되었다.
대화재 이후, 오리어리 부인은 사람들의 시선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냈고, 시카고에서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가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후에 시카고 시정부는 무려 126년이 지난 1997년이 되어서야 대화재 원인은 오리어리 가족과 소의 잘못이 아님을 공식적으로 결론지었다.
노먼 록웰 (Norman Rockwell)의 '오리어리 부인과 그녀의 소' (1935) (사진 퍼옴)
그러면 왜 사람들은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를 싫어했을까?
1837년 시로 승격된 시카고는 정말 빨리 도시 인프라를 건설해 나갔다. 이런 이유로 유럽에서 이주하는 이민자들의 많은 수가 일자리를 찾아 시카고를 찼았다. 1871년 대화재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1600-1800년대에 신대륙에 도착한 유럽 열강과는 달리, 1800년대 들어서 이주한 사람들은 아일랜드인, 폴란드인, 이탈리아인, 유대계 러시아인 등이었는데, 모두들 각 국가 정치, 경제, 사회 사정 때문에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특히, 아일랜드에서는 1840년대에 발생한 대기근으로 거의 100만 명이 아사한 일이 있었다. 또, 1881년 전후로 영국이 아일랜드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개신교계 아일랜드인들이 아닌 가톨릭계 아일랜드인들이 이 통합에 불만을 가졌고, 이것 때문에 차별을 당했다. 이런 차별을 피해 상당수의 카톨릭계 아일랜드인 미국 이민을 택했다.
청교도들이 세운 국가 미국에 너무 많은 수의 가톨릭계 아이랜드인이 이주를 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막강한 위협이 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아일랜드인들은 미국에서도 편견의 대상이 되었다. 시카고 대화재의 원인이 되었던 오리어리 부부가 이런 배경 속에서 마녀사냥을 당했던 것이다.
시카고 워터타워 (시카고 랜드마크). 대화재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건물이다.
아무튼, 시카고 남서쪽 한 외양간에서 일어난 화재는 북동쪽으로 강하게 부는 바람에 실려 시카고 다운타운 쪽으로 뻗어나갔다. 시카고 강이 중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화재가 거기서 멈출 거라는 희망이 있었지만, 당시 다리를 포함한 시카고 강 근처 건축물 거의 대부분이 목조였고 시카고 강 위에도 목재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게다가 소방관들이 전부 화재지점인 서남쪽에 있었고 이미 그곳이 아수라장이었기 때문에, 강북지역으로 불길이 번지는 걸 아무도 확인하지 못했다. 또, 건축물 지붕은 타르로 마감되어 있었고, 강물도 기름이 얽혀있었다고 한다. 화재는 시카고 강에서 멈추지 않고 강북에 위치한 다운타운 대부분을 불태웠다.
시카고의 남서쪽과 북쪽을 잇는 다리들은 전부 전소되었다. 그랜드 애비뉴, 웰스 스트릿, 클라크 스트릿, 스테이트 스트릿, 러쉬 스트릿 등 북쪽 다운타운으로 가는 다리는 모두 다 전소되었다. 특히, 킨지 스트릿이 이어지는 다리는 다른 다리들보다 더 낮게 지어졌기 때문에 모습이 아예 없어질 정도로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이 화재로 시카고는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약 1만 8천 개 건물이 소실되었다. 1871년 시카고 인구는 약 34만 명이었는데, 3분의 1인 약 10만 명이 집을 잃었다. 시카고 워터타워, 올드타운 생미셸 교회 (St Michael's Catholic Church in Old Town), 필슨 (Pilsen) 거주지역의 성 패트릭 성당 (St. Patrick's Church) 등 다운타운에서 온전하게 살아남은 10군데도 안 되는 건축물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주요 건물이 파괴되었다.
화재가 발생한 지 3일째 불길이 멈추었고, 그 뒤로 매우 빠른 속도로 시카고 시민들은 재건을 시작했다. 도시 전체 인프라를 새로 세우는데 일조하여 성공하려는 이민자들이 몰려들게 되었다. 대화재 당시 30만 인구가 재건 시작 9년 만에 50만 인구로 늘어났고 1890년이 되면 100만 인구로 늘어난다. 또, 향후 도시의 화재를 근본적으로 막고자 새로운 화재 규정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대화재 전에도 강하고 건조한 바람 때문에 목조건물 화재가 잦았기 때문에, 다운타운의 목조건물 건축은 금지되었고 석조, 벽돌, 철로 만든 건축이 세워졌다. 시카고만의 특색이 있는 화재에 강한 테라코타 벽돌도 이때 만들어졌다.
1920년부터 호윈 (Horween) 가죽 회사가 본사로 사용하고 있는 벽돌 건물 (2015 N Elston AveChicago, IL 60614)
목조건물 건축 금지가 다운타운에서만 시행된 이유는 수많은 이민자들에게는 석조건물이 너무 비쌌기 때문인데, 이 때문에 시카고 다운타운에서 벗어난 도시 주변에 이민자들 동네가 하나둘씩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경계가 모호해졌지만, 대화재 이후 특정 이민자들만의 각기 다른 개성으로 시카고 여러 랜드마크들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또, 소방관들이 신속하게 화재지점에 도착하지 못했던 여러 이유를 파악하여 소방서와 소방관의 수를 늘리고 시스템을 정비했다. 예를 들어, 밤마다 화재를 감시하는 와치맨 (Watchman)을 300명으로 늘렸다. 또, 3층 이상 건물에는 무조건 철제로 만들어진 대피 길을 만들도록 했다. 현재 세계적으로 채택되고 있는 폴 기둥을 타고 내려오는 소방시스템도 시카고 대화재 이후 시카고에서 최초로 활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도 화재에 관해서 시카고 시정부는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는 듯하다. 내가 짧은 시간 동안 머물던 숙소에서도 조금의 연기로도 화재경보시스템이 작동했으니 말이다. 요리할 때에는 항상 환풍기를 틀어놓지 않으면 시스템이 작동하곤 했다...
웨스트 드코븐 스트릿 558번지 시카고 화재 아카데미 (예전 오리어리 부부 집터) (사진 퍼옴)
오리어리 부부는 사람들의 괴롭힘을 피해 다른 동네로 이사 갔고, 부부가 소유했던 땅에는 이후 소방 아카데미가 지어지게 된다. 그리고 소방 아카데미 바로 서쪽에는 시카고에서 유일한 공립대학인 일리노이 주립대 (University of Illinois Chicago, UIC)가 1982년에 설립되었다.
또, 시카고 구역마다 소방서들도 하나둘씩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웨스트 일리노이 스트리트에 있는 (구) 42번째 소방서이다. 1887년에 건축되었는데 1960년대까지 이 동네 소방관으로 활용되다가 현재는 시카고 랜드마크 (시카고 지정 역사 건물)이다. 이 지역은 북쪽 부근 (Near North)이라고 불리는 동네로 1871년 대화재 전에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이주한 이민자들이 커뮤니티를 형성해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1887년 이 소방관이 건축되었을 당시 이 근방에는 건물이 한 개도 없는 황무지였다고 한다. 지금은 건물을 바라보고 바로 오른편에는 호텔이 세워졌고 바로 왼편에는 시카고 전철 시스템 'L'의 고가철도가 지나간다. 시카고에서 가장 큰 회사들이 밀집해 있는 비즈니스 구역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