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잘못되면, 흔히들 이렇게 변명한다. 악의는 없었다고. 그러니 무고하다고. 맞는 말이다. 애초에 악이란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단지 선의가 없었을 뿐이다. 열의 '부재'가 한기듯이, 빛의 '부재'가 어둠이듯.
나는 아버지를 밀어낸 것이 가족을 위한 좋은 의도였다며 합리화했다. 그런데, 동생의 정신병이 그건 '아버지의 대한 혐오'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나의 모든 말과 행동들이 선이 아닌 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러니까 동생을 위하는 척 가식 떨지 말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오랫동안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어쩌면 자살에 대한 방어기제가 정신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몸이든 정신이든 악화되면 그 끝은 죽음이라는 나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었다. 아버지를 계속 살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도무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아버지가 취해있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 삶이 아닌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3남 3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을 제사,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족보로 여겼던 할아버지는 우리 집안이 권위 있는 양반집안이라 굳게 믿었다. 대한민국에서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조선시대 신분은 할아버지 자존감의 핵심이었다. 고지식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폐쇄적이였고, 욕심이 많아 인색했고, 생활습관은 비위생적인 사회에서 도태된 농민이었다. 육체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술로 노동의 그 고통을 달래는 삶이었지만, 대게 조선시대 농부들이 그러했듯 노동력 충원을 위해 자식은 여섯이나 낳았다. 그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난 내 아버지는 훌륭한 조선의 아들이였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셋이나 낳아 기르는 동안에도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한 아버지의 일순위는 늘 할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할아버지는 양반의 권위와 부모의 사랑 대신, 알코올 중독이라는 정신질환을 물려주셨다.
아버지는 제 자식들은 다르게 살길 바란다며 '농사'가 아닌 '공부'를 시켰다. 하지만 요구하는 종목만 달라졌을 뿐, 강압적인 방식과 태도는 할아버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교육비를 포함한 모든 앙육비를 아까워했고, 학생에게 걸맞지 않은 생산성을 요구했다. 이런 아버지의 모순적인 태도를 보며 왜 굳이 노동이 아닌 공부를, 농장이 아닌 대학을 강요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육체노동을 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본인은 할아버지보다 났다고 자부했다. 그러면서 부모가 죽은 지 거의 10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자식들에게 투정했다. 자신의 유년시절과 우리를 비교하며 자신은 못 받아본 사랑을 제 자식들에게 준 게 억울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 그건 순전히 당신의 착각일 뿐이다. 나 또한 당신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 당신에게 자식들은 실패와 불행을 합리화하는 핑계, 혹은 자신의 자존감을 채우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그러니 나도 당신과 같은 처지다.
아버지와 나의 차이점이 있다면 형제관계다. 아버지가 내게 주신 것 중 거의 유일하게 좋은 것이 동생들이다. 결핍된 보살핌 속에 자라온 우리 남매는 부모보다 서로에게 더 의지했다. 하지만 아버지에겐 형제가 없다. 머리수는 나보다 많지만 없는 것만 못했다. 양반집 자제답게 겉보기엔 점잖았기에 어릴 때는 미처 몰랐다. 제 형제들에게 부모만큼이나 깍듯했던 아버지가 뒤에서는 존칭을 뺀 이름을 부르며 험담만 했댔지만, 이 정도는 형제들 사이에 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만날 때마다 고성이 오가는 외갓집보다 낫다고도 여겼다. 하지만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가 형제들을 만나고 싶어 한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형제간의 정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이들은 그저 양반가문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봐야만 하는 사이였다. 실제로 양반가문에서 봐야만 하는 날 (이를테면 제삿날이나 명절)에만 만났다. 하지만 이런 날조차도 보지 않는 형제도 있다.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작은 아빠다. 언제 한번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크게 깽판을 친 게 작은 아빠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다. 그 후로는 가족 중 그 누구도 다시는 작은아빠를 볼 수 없었다. 그 후 20이지난 지금까지도 아무도 찾지도, 찾아볼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더이상 그 이름이 언급되는 일도 없었다. 어쩌다 작은 아빠 이야기가 나오면 혹시나 자신에게 불똥이 튀진 않을까 불편해하는 분위기였다. 언젠가 장녀인 큰고모가 작은 아빠는 성격이 더러워서 어쩌면 그냥 확 죽어버렸을 수도 있겠다고 말했을 때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농사일을 위해 매주 아버지를 불러냈던 할아버지조차도 죽을 때까지 작은 아빠를 찾지 않았다. 물론 작은 아빠도 할아버지 장례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모든 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별 생각이 없다가도, 문득 이들에게 또 다른 형제가 있다는 것이 상기되면 소름이 끼쳤다. 가족이 사라졌는데도 집안이 평온해왔다는 것이, 어른인 척 내게 덕담을 해주던 이 사람들 중 제대로 된 어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내 아버지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다. 붙잡아 줄 가족이 하나도 없는 작은 아빠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다가, 곧 내 아버지도 불쌍해졋다.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져 버려도 아무도 찾지 않을테니까.
아버지가 자라온 환경과 여전히 그 연장선인 환경을 보면, 편집증은 당연한 결과였다. 나눔의 즐거움을 배우지 못한 아버지는 받는 건 불편하고, 주는 건 아까워했다.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의 성에 못 이겨 겨우 여행을 가는 날에도 운전을 시키려고 자신을 데려가는 거냐며 불평만 했댔다.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추억을 만드는 경험이 없는 아버지는 그 행위에 어떠한 의미를 찾지 못했고, 노동으로만 여겼다.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늘 자신에게 역할을 부여해왔다. 무조건적이어야 할 부모의 사랑에 붙은 조건이 너무 많았던 탓에, 아버지는 평생 제 쓸모를 증명해 보여야 했다. 생존 본능이자 습관이 되어버린 내 아버지는 제 자식들 앞에서도 스스로에게 역할을 부여해 힘듦을 증명해 보였다. 이런 아버지에게 '당신은 기쁘다, 편하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건 생존을 위협하는 말이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내 아버지는 힘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힘들게 사는 것과 열심히 사는 것을 구별하지 못했다. 힘들게만 살아온 아버지는 열심히 살았다며 자부했지만, 정작 무엇을 열심히 하는지는 몰랐다. 사실 아버지는 ‘열심히’는 고사하고 '한다'는 행위조차 없었다. 만성 피로와 무기력증, 우울증에 시달렸던 아버지에겐 소소한 경제활동과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평범한 일상조차 힘들고 피곤한 일이였다. 하루종일 집에만 박혀 술에 취해 티브이만 보는 날이 대부분이였다. 감각이 둔화된 그 공허한 얼굴은 마치 시체같았다. 그 표정 없는 얼굴을 깨우면, 일그러진 표정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살기 위해 죽어있었다. 이런 아버지를 깨우기에 지쳐버린 가족들은 더이상 아버지를 깨우지 않기로 했다. 죽어버린 아버지의 삶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같이 살아도 남보다 못한 아내도, 고등학교 진학과 동시에 독립한 세명의 자녀도, 친구도, 다섯이나 있지만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형제도, 더이상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부모도, 사회적 지위도, 경제적 능력도, 직업적 성취도, 취미도, 관심사도, 식욕조차도. 내 아버지는 이 모든 공백을 오르지 '술'로만 채웠다. 술이 그 모든 공백을 메꿔주지 않았다면, 내 아버지는 분명 자살했을 것이다. 저렇게라도 내 아버지를 계속 살게 하는 술에게 감사라도 해야 하나 생각하다, 차라리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술만 없었으면 진작 죽었을 텐데. 그럼 우리 가족이 이렇게 힘들지 않을 텐데. 아버지가 우리 가족들을 그만 괴롭히게 차라리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하다가,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무서워졌다.
동생과 나의 대화 주제는 언제나 불안과 강박이다. 매일 동생의 병세를 읊어주며 그 불안한 생각과 행동들을 서술했다. 그리고 그 말 끝엔 늘 ‘너 정말 아빠같다. 아빠가 맨날 그러잖아. 어쩜 그렇게 아빠랑 똑같지?’라는 말들이 따라 불었다.
나쁜 것을 지우기 위해 나쁜 것들만 이야기했다. 화가 많아졌고 말투는 날카로워졌다. 동생에 대한 걱정과 부정적인 생각들이 나를 잠식했다. 문득 그런 나자신을 발견하면 더 화가 나서 동생을 비난했고, 그래도 못 견디겠으면 집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럴 때면, 동생을 점점 더 아버지처럼 대하는 것 같아 속상했다. 이대로 가다가 동생도 내 인생에서 밀어내게 될 것 같았다. 그러면 나는 또 말해야겠지. 그건 잘못이 아니라고. 단지 사랑이 모자랐을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