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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Jul 11. 2024

딸의 젖은 머리카락을 말렸다

가로수가 만든 그늘이 고마운 하루였다. 태양을 피해 그늘로만 숨어 다녔다. 그늘을 벗어나면 살가죽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전날 내린 비가 미세먼지를 걷어낸 탓에 한낮 햇볕은 더 들끓었다. 다행인 건 해가 넘어갈 즘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서늘한 공기로 바뀌었다. 낮동안 데워진 몸을 저녁 공기가 식혔다. 사람 참 간사하다. 선선한 바람 탓에 달궈진 아스팔트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처럼 달리고 싶은 욕구가 솟았다. 집에 도착해 옷부터 갈아입었다. 지켜보던 아내에게 슬쩍 떠봤다. "같이 갈래?" 잠깐 고민하던 아내도 따라나섰다. 나는 달리고 아내는 걸었다.


해가 진 호수 공원에는 낮 동안 열기는 오간데 없었다. 달리기 좋았고 걷기에도 그만이었다. 너무 좋았던 걸까? 스마트워치가 알려주는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다. 이참에 실험해 보고 싶었다. 이전보다 속도를 올리면 얼마나 달릴 수 있는지를. 4킬로미터까지는 무난하게 뛰었다. 이때부터 서서히 배가 아팠다. 10킬로미터를 목표로 정했지만 6킬로 지점에서 멈췄다. 한 번 아프기 시작한 배는 달리는 동안에는 나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몸상태에 맞는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 과욕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

아내도 나도 땀에 젖어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저녁상을 차렸고 나는 땀을 식혔다. 그 사이 둘째가 태권도장에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표정이 굳어 있었다. 신발을 벗으며 내뱉는 첫마디가, "오늘 너무 힘들었어!"였다. 관장님이 평소보다 늦게 끝내줬단다. 또 다른 보다 더 힘들게 했다고 앓는 소리를 내뱉으며 거실에 드러누웠다.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둘째 말에 맞장구쳤다. 때마침 저녁밥상이 차려졌다. 둘째를 일으키며 손 씻고 옷 갈아입으라고 했다. 인상을 잔뜩 쓰고 겨우 식탁에 앉았다.


제육볶음, 메추리알장조림, 삶은 양배추, 어묵볶음, 가지볶음, 상추와 오이 그리고 어묵탕과 겉절이까지. 이 정도면 체력과 기운을 회복하기에 모자람 없었다. 내 앞에 밥과 국을 다 먹는 동안 둘째는 깨작깨작 댔다. 힘들었는지 입맛이 없고 배도 고프지 않단다. "잘 먹어야 피로도 풀리는 법인데"라고 한 마디 거들었다. 귀에 들어오지 않는가 보다. 여전히 먹는 둥 마든 둥 물만 두 컵 마셨다. 아내와 내가 다 먹은 걸 확인하고는 자기도 그만 먹겠단다. 그러라고 했다.


아내는 설거지, 둘째는 게임,  나는 씻었다. 씻고 나오니 아내는 TV앞, 둘째는 드러누워 동영상 보는 중이다. 땀에 젖었을 몸과 머리를 감으라고 둘째에 말했다. 피곤을 핑계로 꼼짝하지 않는다. 십분 동안 두고 봤다. 두고 볼수록 더 움직이지 않는다. 그다지 기분 좋은 상태가 아니니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순한 표현으로 에둘러 말했다. 두어 마디 더 듣고서야 씻으러 들어갔다. 옆에서 두고 본 아내는 속이 끓었나 보다. 둘째 뒤통수에 대고 구시렁구시렁 댄다. "힘들었나 보지, 놔두자."


둘째는 젖은 머리 밑으로 수건을 받친 채 선풍기 에 앉았다. 그 옆에 내가 눕고 아내는 씻으러 들어갔다. 누우면 일어나기 싫은 게 사람 마음이다. 둘째의 젖은 머리카락은 드라이기로 말려줘야 한다. 둘째는 아직 드라이기 사용이 익숙지 않다. 초등학교 5학년인데 말이다. 몇 번 시도했지만 잘 되지 않는 것 같다. 맡겨두면 하세월이다. 뻐근한 몸을 일으켜 세워 드라이기를 잡았다. 뜨겁고 차가운 바람을 오가며 젖은 머리를 말렸다.


"친구들은 스스로 머리를 말리니?"

"글쎄. 안 물어봤는데. 그냥 안 말리거나 대충 말린다고 하던데."

"그 말은 아빠가 머리 말려주는 친구는 없다는 거네. 머리 말려주는 아빠 너무 좋지 않냐?"


괜히 옆구리 찔러보고 싶었다. 고마워하는 걸 알지만 그래도 가끔은 고마움도 표현해주고 생색도 내고 싶었다. 머리를 말려줄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조만간 내 손길을 필요치 않을 때가 온다는 거다. 닳아 없어질까 애지중지 키워도 때가 되면 스스로 서야 할 때가 온다. 다 해 줄 수도 없고 다 바라지도 않을 거다. 스스로 드라이기를 사용할 수 있을 만큼만 가르치는 게 내 역할이다. 그러고 난 뒤 태양을 피할 때 그늘을 찾듯 가만히 옆을 지키는 거다. 한여름 가로수가 만든 그늘이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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