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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한 죄책감은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by 김형준

죄책감에 치킨을 시켜줄 수 없어서 저녁밥을 내 손으로 차렸다. 출근한 아내 대신 당연히 그래야 했다. 아내는 저녁을 먹고 들어가겠다고 연락해 왔다. 그게 미안했는지 카카오톡에서 받은 치킨 쿠폰을 보내주며 저녁으로 시켜주라고 말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둘째와 함께하는 동안 이미 점심으로 빵을, 간식으로 초코 음료수를 먹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남은 불고기를 데워 달걀을 반숙으로 풀어 코팅했다. 메추리알, 어묵 볶음, 호박 볶음, 무생채, 김장김치를 4칸 접시에 나눠 담았다. 나만 먹는 멸치 볶음은 반찬통째 올렸다. 지난주에 보쌈시켜 먹고 남은 상추와 배추도 쌈장과 함께 차렸다. 전날 끓여 놓은 김치찌개와 열흘 전 새로 산 전기밥솥으로 아침에 해놓은 백미밥을 한 주걱씩 펐다.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고, 빈 밥그릇을 보고 나서야 그나마 아빠 노롯했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5월 1일 여전히 근로자인 나와 둘째 딸만 쉬었다. 중간고사 중인 첫째와 유치원 교사인 아내는 학교로 유치원으로 등교하고 출근했다. 출근 시간이 1시 인 아내가 오전동안 둘째를 돌봤다. 그동안 나는 사무실에서 글 쓰고, 헬스장에서 PT 받았다. 집에 온 게 12시였다. 아내는 출근했고 둘째는 수학 숙제 중이었다. 운동하는 중간 둘째가 빵이 먹고 싶다고 문자를 보냈다. 하필이면 빵을. 월요일부터 빵(밀가루)을 끊기로 결심했고 4일째 실천 중이었다. 내가 먹지 않는다고 아이들까지 먹지 말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토 달지 않고 사가겠다고 문자 남겼다. 집에 가는 길에 파리바게트에 들렀다. 매장 안을 몇 바퀴 돌아도 빵이 건강하다는 확신은 들지 않는다. 둘째가 잘 먹고 좋아하는 것 중 그나마 건강하겠다 싶은 걸로 골랐다. 나는 빵대신 드레싱 뺀 샐러드 한 팩 담았다. 식탁 위에 사 온 빵을 펼쳐 놓고 골라 먹게 했다. 맞은편에 앉은 나는 건강 챙기겠다며 샐러드와 단백질 음료에 프로틴 맛살까지 먹었다.


배가 부를 양이 아니었지만 다 먹고 나니 눕고 싶었다. 1시간 정도 책상에 앉아 버텼지만 감기는 눈꺼풀을 막지 못했다. 학원에 가기 전 병원에 들르기로 해서 1시간 일찍 나가기로 했다. 둘째가 머리를 감는 동안 나는 거실에서 잤다. 포만감에 낮잠, 오랜만에 맛보는 꿀 빠는 휴식이었다.


수학 학원은 3시 반에 시작이었다. 그전에 정형외과부터 들렸다. 전날 채윤이 학교에서 체육대회가 있었다. 피구를 하던 중 공을 받다가 오른손 새끼와 약지 손가락이 꺾였단다. 부기는 금방 빠졌나 보다. 하루 지나도 통증이 가시지 않는다며 병원에 가자고 먼저 말했다. 겉보기에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아이가 아프다고 말하니 돌다리를 두드리는 심정으로 검사받았다. 다행히 뼈에는 이상 없었고, 근육이 놀란 정도라고 의사가 말했다. 약을 받지 않았다. 상태가 심해지면 다시 오라는 말을 듣고 병원을 나섰다. 3시였다. 학원에 가려면 30분 남았다. 길에서 30분 동안 할 게 없었다. 궁리 끝에 길 건너 스타벅스에서 무료 쿠폰으로 음료수 한 잔 마시기로 했다. 이곳은 어른에게는 선택지가 다양하지만, 초등학생이 마실 수 있는 건 몇 가지 안 된다. 그것도 대개 설탕이 빠지지 않는 달달한 것들이다. 둘째는 '초콜릿 크림 칩 프라푸치노'를 골랐다. 모카 소스와 얼음, 초콜릿 칩과 생크림 위에 초콜릿 드리즐을 뿌렸다. 구멍이 넓은 빨대로 초콜릿이 뿌려진 크림을 퍼먹고, 초코칩이 든 음료는 빨아먹었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봐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옳은 선택이었는지 나에게 물었다.


5년 전부터 건강해지려고 음식을 가리는 중이다. 술도 끊었고 야식도 먹지 않고 평일 한 끼는 샐러드를 꼭 먹는다. 탄산음료와 매장에서 파는 커피 음료는 마시지 않는다. 햄버거도 일 년에 한 번 꼴로 먹었었다. 운동도 하면서 나름 철저히 관리해 왔다. 관리를 통해 내가 아무리 좋아져도 가족에게 똑같이 하라고 할 수 없다. 시켜도 하지 않을 테니까. 여기서 고민이 시작된다. 먹고 싶은 대로 먹이는 게 맞는지? 내가 아는 대로 건강한 음식 위주로 먹여야 하는지? 몸에 좋은 건 맛이 없고 준비하기 불편하다. 맛보다는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는 것 같다. 반대로 맛있고 손쉽게 준비할 수 있다면 누구나 먹을 테지만, 이런 음식이 거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평소에는 아내가 아이들 밥을 책임진다. 나는 직장에 다닌다는 핑계로 가끔 아주 가끔 한 끼 챙기는 정도였다. 반찬 고민은 늘 아내 몫이었다. 아내도 건강하고 맛있는 밥을 차려주고 싶어 한다. 마트에서 장을 볼 때마다 한숨 섞인 탄식을 내뱉는다. 매장을 한 바퀴 돌아도 만들어주는 반찬이 뻔하다는 거다. 이마저도 잘 먹지 않아서 며칠씩 냉장고에 자리해 있다고. 내가 집에서 저녁을 먹지 않으면 반찬 줄어드는 게 보이지 않을 정도란다. 사정이 이러니 안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합리화하며 빵에 컵라면에 과자를 사 먹인다. 굶기는 것보다는 그나마 나을 테니까.


십 대 두 딸은 뭐든 잘 먹을 때다. 오십 대인 나와 아내는 뭐든 가려 먹어야 할 때다. 둘 사이 음식에 공통점이 점점 줄어든다. 한 가지 메뉴로 좁혀질 때가 거의 없다. 드러내지는 못해도 이왕이면 건강한 음식을 선택했으면 바란다. 지나친 욕심인 건 잘 안다. 먹는 즐거움을 뺏는 걸 테니까. 반 강제로 건강한 음식만 해줄 자신 없으니 어느 정도 허락해 줄 필요도 있다. 그런 자유라도 누려야 부모 말도 들어줄 테니까. 아내와 나도 적당히 풀어주며 취할 건 취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니 지금 느끼는 죄책감은 잠시 모른 척하기로 했다. 한참 클 때다. 잘 먹는 게 무엇보다 중요할 때다. 먹고 싶은 걸 먹을 때 잘 먹을 것이고, 잘 먹으면 그게 곧 건강해지는 거라 믿는다. 그래도 횟수는 조절해 주는 게 부모 역할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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