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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준 Mar 26. 2021

어머니가 만들어준 음식에선 뒷 맛이 남았다.

밥상머리에서 배운 인생

"이번 주 일요일 올 수 있겠니?"

"이번 주요? 특별한 일 없으니까 점심때 맞춰 갈게요."

"점심도 먹고 애들 구경도 하게 **몰에서 볼까?"

"네. 12시까지 갈게요."

"그럼 오는 길에 여기 잠깐 들려. 엄마가 반찬거리 몇  가지 사놨으니까 가져가."

"아이참 그런 것 좀 안 하면 안 돼요? 우리도 알아서 잘 챙겨 먹으니까 엄마 드실 만큼만 사세요."

"엄마 필요한 거 사면서 조금 더 산 거니까 그냥 가져가. 쌀도 작은 거 한 포 있으니까 같이 가져가고."

어머니는 10여 년째 요양 도우미로 남의 집 생활을 이어오고 있었다. 숙식을 제공받는 곳이라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요양 도우미를 하며 살림도 살아야 했다. 살림을 위해 장을 봐야 하고, 장을 볼 때마다 챙겨 주고 싶은 것들을 조금씩 쟁여 놓는다. 한두 달 간격으로 쟁여 놓은 식재료를 주기 위해 나를 호출했다. 나는 그렇게 불려 가는 게 싫었다.


10살쯤으로 기억한다. 부모님은 별거 중이었다. 어머니는 연고가 없는 서울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식모 일을 하고 있었다. 별거 중에도 가끔 밖에서 우리를 만다. 집이 아닌 곳에서 몇 시간 보는 게 전부였다. 그때마다 어머니의 손에는 우리에게 줄 음식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직접 만든 것도 있고, 쉽게 먹을 수 없는 거라며 조금씩 덜어 놓은 음식도 있었다. 허락된 몇 시간을 보내고 나면 보따리가 들려진 체 또다시 이별해야 했다. 그때는 어머니와 헤어진다는 아쉬움보다 내 손에 들린 보따리가 더 싫었다. 형들과 같이 있긴 했지만 보따리를 든 손이 창피했다. 사람들 내가 든 보따리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때는 그 안에 담긴 게 단순한 음식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해 가을, 어머니 그 집에서 나왔다.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어서였다. 큰 형과 함께 살 던 집도 형이 떠난 후 처분했다. 혼자 살 집이 필요했고, 내가 사는 곳과 멀지 않은 곳에 새 집을 마련했다. 아픈 큰 형에게 좋은 환경에서 살게 하겠다는 소원을 떠나고 나서야 이루게 되었다. 혼자 지내기엔 빈 공간이 더 넓게 느껴지는 집이었다. 이사 오고 얼마 뒤 주말이면 어김없이 연락이 왔다.

"이모가 생선을 사서 보냈는데 와서 가져갈래?"

"조금 있다 시간 봐서 들릴게요."

정해진 일정이 없으면 시간을 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있어서 선뜻 가겠다는 대답을 못했다. 내 상황이 어떠하든 멀지 않으니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집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손이 바빠진다. 냉장고 청소라도 하듯이 이것저것 꺼내 담기 시작한다. 어릴 적 우리를 만나러 오기 전 한 보따리의 음식을 준비했듯 담을 수 있는 건 무 조리 꺼내 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별거 중 짧은 만남 뒤 내 손에 들린 음식 보따리로 창피함을 느꼈던 그때의 '나'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런 감정이 오버랩되기 시작하면서 나도 툴툴거리기 시작한다.

"그만 담으세요. 전에 준 것도 아직 못 먹고 있어요. 냉장고 자리도 없다고요."

"여기 놔두면 못 먹고 버린다. 아까운 음식 버리지 말고 먹어야지."

"애들도 먹는 것만 먹으려고 해서 지금 있는 것도 다 못 먹고 있어요."

이제 그만 챙겨도 된다고, 어머니 먹을 만큼만 해서 드시면 된다고, 몸도 안 좋으니 음식 만드는데 힘 빼지 마시라는 의미로 돌려 말해보지만 들으려 하지 않는다. 막무가내인 어머니를 보고 있으면 그동안 나와 어머니 사이에 쌓아온 벽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어머니와 나는 많이 부딪혔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 대화가 눈에 띄게 줄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의 말에 반감이 먼저 들었다. 어머니는 고지식한 편이다. 당신의 말이 옳다는 믿음이 누구보다 강했고 자식들이 따라와 주길 바랐다. 그 이면엔 '다 너희들을 위한 거야'라는 믿음이 단단하게 쌓여있었다. 그 벽에 부딪힐 때마다 큰 소리가 오고 갔다. 대부분 내가 포기하며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싸울 때마다 나 스스로도 벽을 쌓았다. 어머니를 설득하기보다 내가 먼저 입을 닫았다. 처음엔 설득해보려고도 했지만 이미 단단해진 믿음은 갈라질 틈이 없어 보였다. 더 이상 안 되는 일에 노력하기보다 둘 사이에 놓인 벽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머니는 어머니로, 나는 나로.


어머니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입에 달고 살아왔다.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못 만들었고, 관심과 애정을 제때 주지 못했고, 해줄 수 있는 것보다 해주지 못한 게 많았다고 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어머니도 피해자이다. 순탄하지 못했던 결혼 생활은 어머니 만의 잘못은 아니다. 결혼 생활이 틀어져도, 하는 일이 실패해도, 그때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왔다고 믿는다. 별거 중일 때도, 요양 도우미 일 때도, 혼자 지내는 지금도 수시로 음식을 챙겨주는 건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  

한 가지 바람이 있다. 바람으로 그칠 수도 있다. 이제 정말 어머니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당신으로 인해 큰 아들을 먼저 보냈다는 자책도 내려놓았으면 한다. 못 먹인 것에 대한 자괴감도 벗어버렸으면 한다. 앞으로는 어머니의 음식에서 '미안함'이라는 뒷 맛보다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에 대한 '당당한' 단맛을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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