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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허브 바질의 역사와 어원

동서양을 가로지른 바질의 대서사시

by 이지현

오늘날 전 세계인의 식탁을 풍요롭게 채우는 바질은, 그 친숙한 모습 이면에 시공간을 초월하는 장대한 서사를 품고 있다. 학명 Ocimum basilicum 속에 담긴 '왕'이라는 이름처럼, 바질은 고대 문명에서 신에게 바치는 숭고한 제물이자 왕실의 정원을 빛내는 고귀한 존재로 여겨졌다.인도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신성한 ‘툴시’로 숭배받던 이 식물은,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길을 따라 서양으로 건너가며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의학적 호기심과 민간의 두려움이 공존하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지나, 낭만과 비극이 교차하는 중세 유럽의 문학 속에 피어나기까지, 바질은 인간의 삶 가장 깊숙한 곳에서 함께 호흡해 왔다. 이제부터 우리는 바질이라는 이름에 얽힌 언어학적 뿌리를 더듬어 보고, 동방의 성스러운 숲에서 시작되어 서방의 화려한 식탁으로 이어지는 바질의 아름답고도 극적인 여정을 따라가 본다.




신성한 툴시의 땅

바질의 원산지로 추정되는 인도에서, 이 식물은 식재료가 아닌 성스러운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었다. 이곳에서 바질은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영적인 매개체로 여겨졌다.


비슈누 신의 배우자

인도에서 바질의 일종인 홀리 바질은 툴시(Tulsi)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힌두교의 유지신 비슈누의 배우자인 여신 락슈미의 화신으로 숭배된다. 거의 모든 전통적인 힌두 가정의 마당이나 제단에는 툴시 화분이 놓여 있으며, 아침저녁으로 이 식물에 기도하고 물을 주는 것은 경건한 일상의 의식이다. 인도인들은 툴시 잎 하나가 죄를 씻어내고 영혼을 정화하며, 죽음의 신 야마로부터 영혼을 보호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임종을 앞둔 사람의 입에 툴시 잎과 강가의 물을 넣어주는 것은 중요한 장례 절차 중 하나로 전해진다.


아유르베다 의학의 핵심 약재

인도의 전통 의학 아유르베다(Ayurveda)에서 툴시는 자연의 어머니 약으로 불릴 만큼 중요한 약재로 다루어진다. 고대 문헌인 차라카 삼히타에는 툴시가 독소를 해독하고, 호흡기 질환을 치료하며, 곤충이나 뱀에 물린 상처를 낫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툴시는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주는 아답토젠 허브의 원형으로 여겨져, 정신적인 균형과 장수를 돕는 영약으로 취급되었다. 기원전부터 인도인들은 툴시 차를 마시며 면역력을 키우고, 잎을 씹어 구강을 청결히 하는 등 생활 속에서 바질의 치유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온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과 서쪽으로의 전파

인도 대륙에 머물던 바질이 서양 세계로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으로 추정된다. 알렉산더의 군대는 인도 원정 중 이 향기로운 식물을 발견하고 그리스로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이 과정을 통해 인도의 신성한 툴시는 지중해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며 스위트 바질이라는 새로운 품종으로 분화되고, 서양의 문화와 만나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을 것이다. 동방의 신성함이 서방의 실용주의와 만나면서 바질의 운명은 종교적 상징에서 미식과 의학의 재료로 점차 변화하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지중해 세계에 도착한 바질은 극단적으로 상반된 대접을 받았다. 어떤 이들은 이를 저주했고, 어떤 이들은 사랑의 묘약으로 숭배했다. 이러한 이중성은 바질의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다.


가난과 증오의 상징

고대 그리스의 일부 전통에서는 바질을 불운이나 가난의 상징으로 여기기도 했다. 바질이 너무 잘 자라거나 무성하면 오히려 그 집안에 흉사가 든다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바질 씨앗을 심을 때는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어야만 싹이 잘 트고, 조용히 심으면 자라지 않는다는 기이한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로마 시대까지 이어져, 라틴어 속담이나 프랑스어 표현 "바질을 심듯이 한다(semer le basilic)"는 말은 누군가를 학대하거나 거칠게 다룬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아마도 바질의 강한 생명력과 톡 쏘는 향기가 사람들에게 거칠고 야생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플리니우스와 디오스코리데스의 의학적 기록

미신과는 별개로, 고대의 학자들은 바질의 의학적 효능에 주목했다.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우스는 바질이 황달, 수종, 그리고 뱀에 물린 상처에 효과가 있다고 기록했다. 그리스의 의사 디오스코리데스 역시 그의 저서 『약물지(De Materia Medica)』에서 바질을 소화 불량과 눈의 통증을 치료하는 약초로 분류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질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시력이 나빠지거나 미치광이가 될 수 있다는 경고도 함께 기록되어 있어, 당시 사람들이 이 식물의 강력한 약성을 얼마나 경계하면서도 활용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중세의 문화와 상징

중세 말기와 르네상스 초기에 이르러 바질은 문학과 예술 속에서 낭만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사랑, 그리고 죽음을 상징하는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이사벨라의 화분

14세기 이탈리아 작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는 바질과 관련된 가장 유명하고도 기괴한 사랑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여주인공 이사벨라는 오빠들에 의해 살해당한 연인 로렌초의 머리를 잘라 화분에 묻고, 그 위에 바질을 심는다. 그녀는 매일 그 바질에 자신의 눈물을 주며 키우다가 결국 슬픔 속에 죽어간다. 이 이야기 속에서 바질은 죽은 연인의 영혼이 깃든 식물이자, 죽음을 초월한 비극적인 사랑의 매개체로 묘사된다. 바질 화분은 단순한 원예가 아니라, 잃어버린 사랑을 기리고 애도하는 제단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이탈리아의 사랑의 풀(Erba di Amore)

비극적인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에서 바질은 여전히 강력한 사랑의 부적이었다. 중세 이탈리아 여인들은 바질 화분을 발코니에 내놓아 구혼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이 열려 있음을 알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한, 남자가 여자에게 바질 가지를 선물하는 것은 청혼의 의미를 담고 있었으며, 여자가 이를 받아들이면 약혼이 성립된 것으로 간주하기도 했다고 한다.


몰다비아의 전설, 영원한 사랑의 맹세

동유럽의 몰다비아 지역에는 한 청년이 마을 처녀에게 바질 꽃다발을 받으면 그 두 사람은 반드시 결혼하게 된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또한 바질을 지니고 다니면 영원히 늙지 않고 사랑을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도 있었다. 이처럼 중세 유럽 곳곳에서 바질은 죽음과 공포의 이미지를 벗고, 점차 인간의 가장 뜨거운 감정인 사랑과 결합하여 낭만적인 상징으로 변모해 갔다. 이는 훗날 바질이 식탁 위에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허브로 완전히 자리 잡게 되는 문화적 토대가 되었다.




고대 인도의 신성한 제단에서부터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중세에 이르기까지, 바질은 극과 극을 오가는 파란만장한 여정을 거쳐왔다. 인도의 툴시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영적인 매개체로서 경건한 믿음의 대상이었다면, 지중해와 유럽을 거친 바질은 인간의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모두 담아내는 삶의 동반자로 거듭났다. 누군가에게는 치유의 약초였고, 누군가에게는 죽음을 초월한 사랑의 징표였던 바질은, 그 강인한 생명력만큼이나 다양한 의미로 문명 속에 뿌리내렸다. 바질 특유의 달콤하고 쌉싸름한 향기 속에는 수천 년을 이어온 사람들의 기도와 눈물, 그리고 사랑의 맹세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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