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산업(Archival/Industrial)'

겹겹이 쌓인 시간과 도시, 샌프란시스코

by 정현재

1906년: 지진과 재건


1906년 4월 18일 새벽, 대지진이 샌프란시스코를 강타했습니다. 진동이 멈추기도 전에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고, 수일간 번진 화마는 도시의 80%를 집어삼켰습니다. 벽돌로 지어진 골드 러시 시대의 많은 건물들은 이때 대부분 붕괴하거나 불탔지만, 다행히 유연한 목조 구조 덕분에 상당수의 빅토리아 목조주택 들은 무너져 내리지 않았습니다. 특히 노브 힐 정상에 늘어서 있던 부호들의 석조 맨션은 폐허가 되었지만, 언덕 서쪽과 남쪽에 자리한 서민들의 목조 주택 지구는 불길이 덜 미쳐 비교적 많이 살아남았습니다. 그 덕분에 오늘날까지 남은 빅토리아풍 주택들은 지진 이전 도시의 기억을 간직한 생생한 유물이 되었습니다.


폐허 위에서 도시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막중한 사명이 샌프란시스코 시민들 앞에 놓였습니다. 재건은 빠르게 그리고 야심차게 진행되었습니다. 건축가들은 더욱 내진 설계를 강화한 건물들을 설계했고, 도시 당국은 도로를 넓히고 새로운 도시계획을 적용하려 했습니다. 비록 대대적인 개조 계획(예를 들면 건축가 대니얼 번햄의 이상도시 계획)은 시민들의 반대와 시간 부족으로 부분적으로만 실현되었지만, 그래도 시청(City Hall)을 비롯한 많은 공공건축이 Beaux-Arts 양식으로 새로이 건설되며 도시의 경관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화염에 사라졌던 오페라 극장, 호텔, 상업 빌딩들도 속속 현대식으로 재건되었고, 한때 잿더미였던 마켓 가와 밴 네스 가에는 자동차와 전차가 다시 분주히 오가기 시작했습니다.

재건을 통해 탄생한 새로운 샌프란시스코는 이전보다 정비되고 세련된 모습이었지만, 그 거리마다에는 여전히 과거의 잔재와 추억이 공존했습니다. 언덕배기 목조주택 들은 살아남아 옛 정취를 품고 있었고, 새로 지은 웅장한 건물들은 미래를 향한 도시의 야망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옛것과 새것의 병존은 샌프란시스코의 정체성이 되었고, 이후 다가올 세월에도 계속해서 반복될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1906년의 참극을 딛고 일어난 도시는 곧이어 20세기 황금시대로 접어들며 또 다른 문화의 Layer를 쌓아갑니다.


“The city does not tell its past, but contains it like the lines of a hand.”
도시는 과거를 말하지 않는다. 대신 손금처럼 그 흔적을 간직한다.

- Italo Calvino 『보이지 않는 도시들』


골드 러시의 도래와 잭슨 스퀘어

샌프란시스코의 아이덴티티를 설명하자면 우리는 더 먼 과거를 보아야 합니다.

1848년 금광 발견 소식이 전 세계로 퍼지자 수천 명의 이주민들이 샌프란시스코에 몰려들었습니다. 불과 몇 년 만에 작고 한적했던 마을은 거칠지만 활기찬 항구 도시로 변모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잭슨 스퀘어 일대에는 당시 급조된 상업 건물들이 들어섰습니다. 벽돌과 주철로 지은 이 지역의 건물들은 19세기 중엽 골드 러시 시대의 유산으로, 오늘날까지도 클래식 부흥 및 이탈리아풍 양식의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한때 바바리 해안(Barbary Coast)이라고 불리던 이곳은 선술집과 극장, 사창가가 즐비했던 무법지대로도 유명했지만, 바로 이 혼란 속에서 샌프란시스코는 도시로서의 첫 Layer를 쌓아 올렸습니다. 금을 찾아 온 모험가들 사이에는 멕시코·칠레·페루 등 라틴 아메리카 출신도 많았고, 그들은 브로드웨이 근처에 정착해 ‘라틴쿼터 Latin Quater’를 형성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얽혀 만들어낸 초기 샌프란시스코의 모습은, 이후 쌓일 수많은 문화층과 건축층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잭슨 스퀘어의 낡은 벽돌 건물들 사이 골목길을 거닐다 보면, 문득 170여 년 전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마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 노천 술집의 왁자한 웃음소리, 각국 언어로 뒤섞인 흥정 소리가 울려퍼지던 그 시절의 풍경 말입니다. 그러나 도시의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기에, 우리는 이내 다음 장면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됩니다. 금광 열풍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 샌프란시스코는 좀 더 질서 있는 도시로 거듭나기 시작했고, 새로운 정착민들은 해안가에서 멀지 않은 미션 지구까지 영역을 넓혀갔습니다.


선교에서 마을로: 미션 지구와 라틴 커뮤니티

샌프란시스코의 미션 디스트릭트(Mission District)는 도시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Layer 중 하나입니다. 이곳에는 1776년 스페인 정착민들이 세운 돌로레스 선교회(Mission Dolores)가 자리하고 있는데, 원주민 욜레무(Ohlone)족의 땅 위에 세워진 이 흰색 어도비 교회는 스페인 식민 시대의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19세기 중반 골드 러시로 미국이 캘리포니아를 차지한 이후에도, 미션 주변에는 멕시코계 토착민과 라틴계 이민자들의 공동체가 이어졌습니다. 초기에는 선교회 목장 주변으로 형성된 한적한 교외 지역이었지만, 도시가 팽창하면서 미션 지구는 서민들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19세기 말 철도가 놓이고 길이 포장되지, 아일랜드·독일 이민자부터 이탈리아·러시아계까지 다양한 주민들이 이 일대에 모여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동네의 정체성을 결정적으로 빚어낸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 대거 유입된 라틴 아메리카계 주민들입니다. 특히 1940~50년대에 걸쳐 멕시코와 중남미 출신 이민자들이 미션 지구로 이주하면서, 스페인어 간판의 상점과 타코리아 Taqueria, 라틴 음악이 흐르는 볼룸, 판다리아(멕시코 빵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24번가와 미션가를 따라 형성된 상업 지구는 샌프란시스코의 라티노 문화 중심지로 변모했고, 이곳에서는 멕시코의 카르나발 축제와 중미 독립기념 행사 등이 매해 열리며 라틴 공동체의 자긍심을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층위는 단순히 이민자들의 향수에 머무르지 않고, 도시를 풍성하게 하는 새로운 색채로서 샌프란시스코 전체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는 다시 도심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샌프란시스코는 골드 러시의 광풍이 지난 뒤에도 지속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도시의 거리 풍경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아하고 화려한 빅토리아 시대 주택들입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주택과 도시의 번영

19세기 후반 샌프란시스코는 금과 은으로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급격히 번영했습니다. 언덕 위와 계곡마다 목조 주택이 빼곡히 들어섰고, 그중에서도 당대 유행이던 빅토리아식 주택들은 도시 경관을 형성하는 대표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1849년부터 1915년 사이에 무려 4만8천 채에 달하는 빅토리아 및 에드워디안 스타일의 집들이 지어졌다고 하니, 그 규모를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이 목조 주택들은 다채로운 색으로 외벽을 칠해 섬세한 장식들을 강조했는데, 실제 1880년대 신문에는 “붉은색, 노란색, 초콜릿색, 주황색 등 요란한 색들이 유행하여 상층부가 빨강이나 파랑이 아니면 노랑과 갈색으로 못생긴 패널을 만들어 놨다”는 평이 실릴 정도였습니다.


이 시기의 주택들은 ‘페인티드 레이디스(Painted Ladies)’란 애칭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1960년대 이후 후손들이 낡은 빅토리아 주택들을 화려하게 다시 칠하며 붙여진 이름입니다. 가장 유명한 예로 알라모 스퀘어 공원 옆 스타이너 가에 늘어선 일곱 채의 빅토리아 주택은 postcard에 단골로 등장하는 풍경입니다. 우아한 처마선과 색유리 창, 목조 난간으로 치장된 이 집들은 언덕 너머로 보이는 현대적 다운타운의 마천루들과 어우러져, 샌프란시스코가 간직한 시간의 겹을 눈앞에 드러내 줍니다. 19세기 말 도시의 호황을 상징하듯 세련된 외관을 뽐내던 빅토리아 주택들은, 그러나 곧 닥쳐올 대재앙 앞에서 그 운명이 갈리게 되었습니다.


황금시대의 여흥: 1920년대와 카스트로 극장


지진과 재건의 격동기를 넘긴 샌프란시스코는 1920년대에 들어 새로운 활력을 띠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찾아온 번영 속에서 도시는 현대 대중문화의 물결을 적극 받아들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곳곳에 세워진 호화로운 영화 극장들이었습니다. 전기조명이 휘황찬란한 마키(Marquee)가 거리를 밝히고, 사람들은 우아한 옷차림으로 신식 극장에 모여 무성영화를 감상하곤 했습니다.


카스트로 극장(Castro Theatre)은 바로 이 시대의 산물로, 1922년 샌프란시스코의 카스트로 거리 한 모퉁이에 문을 열었습니다. 건축가 티모시 플루거(Timothy Pflueger)가 설계한 이 극장은 스페인 바로크 양식인 추리게레스코(Churrigueresque) 풍의 화려한 파사드를 자랑합니다. 석고로 섬세하게 조각된 중앙의 아치형 창과 두텁게 장식된 벽면은 인근에 자리한 18세기 미션 돌로레스 교회의 정면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새 시대의 오락 시설이 의도적으로 옛 건축 유산에 경의를 표한 사례였습니다. 붉은 네온사인이 빛나는 높다란 “CASTRO” 간판은 멀리서도 이 극장의 존재를 알렸고, 곧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실내로 들어서면 1,400석 규모의 객석 위로 돔 천장이 펼쳐지고, 벽면과 천장 가장자리에는 오목볼록한 곡선과 섬세한 몰딩이 사치스럽게 꾸며져 있습니다. 무대 옆에는 거대한 워럴리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어 공연이나 영화 상영 전에 생생한 음악을 들려주곤 했습니다. 카스트로 극장은 애초에 동네 영화관으로 지어졌지만, 그 규모와 아름다움 덕분에 도시 전역에 명성을 떨쳤고 다양한 시사회와 행사가 열리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몇십 년 후 1970년대에 이르러 카스트로 지역이 성소수자들의 커뮤니티 중심지로 떠오를 때, 이 극장은 게이 프라이드 영화제와 추모 집회 등 새로운 역사적 순간들의 무대가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한 건축물이 세월에 따라 용도와 의미를 달리하면서, 도시의 문화적 층위는 계속해서 켜켜이 쌓여갑니다.

1920년대의 소비문화와 활기는 1930년대 대공황으로 한숨 돌리게 되지만, 샌프란시스코는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세계에 드러낼 커다란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미래를 향한 꿈과 기술의 축제를 여는 것이었습니다.


Treasure Island과 세계 박람회 (1939)


1930년대 후반, 샌프란시스코는 경제 대공황의 먹구름을 걷어내고자 야심 찬 프로젝트를 추진합니다. 1937년에 금문교와 베이브리지라는 두 개의 위대한 다리가 완공되자, 도시는 그 축복을 기념하고 태평양 시대의 개막을 알릴 세계 박람회를 계획했습니다. 박람회장은 기존의 육지가 아닌, 새로 만들어낸 섬에 건설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Treasure Island 입니다. 예르바 부에나 섬 옆 얕은 바다를 준설해 만들어낸 인공섬은, 1939년 개막한 골든게이트 국제 박람회(Golden Gate International Exposition)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태평양의 향연 Pageant of the Pacific’라는 주제로 열린 이 박람회는 태평양을 둘러싼 각국의 문화와 산업을 한데 모아 전시했습니다. 이를 반영하듯 박람회 건축은 아르데코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 - 예를 들어 마야나 잉카, 그리고 스페인 식민 양식의 디자인 요소를 조합한 독특한 양식, 이른바 ‘퍼시피카(Pacifica)’ 스타일로 건설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상징물인 80피트 높이의 태양의 탑(Tower of the Sun)과 바다의 여신상을 형상화한 거대한 조각 ‘퍼시피카’는 박람회의 이상을 체현했습니다. 야간에는 첨단 조명 기술로 박람회장이 환상적으로 빛나, 당시 사람들에게 근심을 잊게 할 미래 도시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축제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습니다. 1940년까지 두 시즌을 운영한 박람회는 경영난으로 막을 내렸고, 곧이어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습니다. 박람회장으로 쓰였던 보물섬은 미 해군에 인수되어 해군 기지로 전용되었고, 샌프란시스코의 도시는 평화의 축제 무대에서 일순간 전쟁 물자의 집결지로 변모했습니다. 이렇듯 짧은 시간이었지만, 1939년의 보물섬 박람회는 샌프란시스코의 역사에 또 하나의 층을 더했습니다. 인공섬 위에 일시적으로 세워졌던 웅장한 건축물들은 대부분 사라졌어도, 그 자리에 깃든 세계시민적 포부와 디자인 유산은 이후 도시 계획과 예술에 영감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박람회의 막이 내리고 전쟁의 구름이 드리운 1940년대, 샌프란시스코는 다시 한 번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됩니다. 이제 축제의 도시가 아닌 공업과 생산의 도시로서, 새로운 장을 열었던 시기로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전쟁과 공업 시대: 도그패치의 노동자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샌프란시스코의 동부 해안가 전체는 거대한 산업 현장으로 변모했습니다. 헌터스 포인트 조선소와 리치먼드 조선소(인근 도시)에서는 자유선을 비롯한 군함들이 쉼 없이 건조되었고, 수많은 군수 공장이 가동되었습니다. 도시 남동부의 도그패치(Dogpatch) 지역 역시 이러한 전시 생산의 핵심 거점 중 하나였습니다. 사실 도그패치는 골드 러시 직후인 19세기 중반부터 포트레로 언덕 기슭에 공장과 조선소가 들어서며 발전한 산업 지구였습니다. 1860년대에 이미 이곳 포트레로 포인트에는 선박용 밧줄을 제조하는 텁스 로프 공장, 화약 공장, 여러 목조 선박 조선소들이 둥지를 틀었고, 1880년대에는 대규모 아이언 웍스(Union Iron Works)가 이곳에서 철갑 군함까지 건조해냈습니다. 이러한 산업들의 발달로 인근에는 노동자들이 거주할 주택이 필요했고, 도그패치에는 선박공장 인부와 부두 노동자들을 위한 작은 주택들이 밀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도그패치 거리엔 1870~80년대에 지어진 소박한 빅토리아식 노동자 주택들이 남아 있는데, 이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오래된 산업 노동자 주택 밀집지로서 역사적 가치를 지닙니다.


1940년대 전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도그패치와 인근 해안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노동자들과 군인들로 북적였습니다. 배를 만들고, 군수품을 조립하고, 항만을 통해 인적·물적 자원이 태평양 전장으로 실어 나르는 등, 샌프란시스코는 “태평양으로 가는 관문”으로서 풀가동되었습니다. 당시 이주해 온 노동자들에는 미국 남부 출신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전후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해 도시의 인종적·문화적 다양성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 한 층을 보태주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이런 산업 황금기는 급격히 저물었습니다. 미 해군은 1945년 이후 조선소를 점차 축소하거나 폐쇄했고, 민간 공장들도 경쟁과 기술 변화로 문을 닫았습니다. 도그패치의 부둣가에는 한때 활기차던 크레인들과 노동자의 함성이 사라지고, 녹슨 창고와 폐선만 남게 되었습니다. 산업화 시대의 퇴장은 샌프란시스코에 새로운 숙제를 안겨주었습니다. 쇠퇴해버린 산업 지구와 인구 유출이라는 현실 속에서, 도시는 다음 시대의 활로를 모색해야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어지는 것이, 20세기 중반의 도시 재편과 그에 맞선 사회운동의 물결입니다.


중반 세기의 그림자: 쇠퇴하는 소마와 변화의 서막



1950~60년대에 들어 샌프란시스코는 전후 도시 변화의 격랑에 놓이게 됩니다. 산업 시대의 퇴조와 함께 도심 인근의 여러 지역이 침체를 겪었는데, 특히 소마(SOMA, South of Market) 지구가 그러했습니다. 소마는 원래 창고와 공장이 밀집한 노동자 지역이었지만, 전쟁 후 제조업이 쇠락하자 빈 건물들과 값싼 하숙시설들로 넘쳐나는 도심 빈곤지대로 변해갔습니다. 한편 그 무렵 미국 전역에서 일어난 교외화 현상(suburbanization)으로 중산층 주민들이 도시를 떠나자, 샌프란시스코 인구도 감소세를 보였습니다. 낡은 건물과 빈민들이 늘어가는 소마와 같은 구역은 시 당국의 눈에 “blight(황폐화)”로 비쳤고, 도시 계획가들은 이를 재개발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1960년대 샌프란시스코 재개발국(SFRA)은 소마 지역을 통째로 철거하여 현대적인 상업지구로 바꾸는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저소득층 주민들이 강제 이주당했고, 그 중에는 1차 세계대전 후 정착했던 필리핀계 해방자들과 노령의 노동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살던 허름한 호텔과 하숙집이 무너진 자리에, 오늘날 모스코니 컨벤션 센터와 예르바 부에나 가든, 고층 빌딩들이 들어섰습니다. 재개발은 도시 미관을 일신했지만, 동시에 공동체 해체와 주거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이에 반발하여 TOOR(Tenants and Owners in Opposition to Redevelopment) 같은 주민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현대화”의 물결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중반 세기의 격변 속에서, 샌프란시스코는 한편으로 새로운 문화 혁명의 무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1967년의 서머 오브 러브로 상징되는 히피 운동이 헤이트-애쉬버리 거리에서 꽃피웠고, 같은 시기 흑인 시민권 운동과 반전 시위가 도시 곳곳에서 벌어졌습니다. 소마와 인접한 필모어 지구에서는 재즈와 소울 음악이 울려퍼졌으며, 캐스트로 거리에는 성소수자들이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1970년대 게이 권리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또 미션 지구에서는 멕시코계 청년들과 이웃들이 교육권과 주거권을 요구하는 시위에 나섰고, 공동체 조직(MCO 등)을 통해 목소리를 냈습니다. 도시의 낡은 틀을 깨고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려는 이 모든 움직임은, 물리적인 건축과 거리 경관뿐 아니라 사회적·문화적 공간의 재편이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샌프란시스코는 낡은 산업 시대의 막을 내리고, 다원화된 문화와 저항 정신이 들끓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한복판에서, 특히 미션 지구의 예술가들과 주민들은 독창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도시 공간에 새겨넣기 시작했습니다.


벽화로 쓴 역사: 미션 지구의 저항 (1970년대~현재)

1970년대 중반, 미션 지구의 골목길 담벼락과 차고 문들은 화려한 색채의 벽화(mural)들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커뮤니티 벽화 운동의 선구에는 여성 히스패닉 예술가 그룹 ‘무헤레스 무랄리스타스(Mujeres Muralistas)’가 있었습니다. 1974년, 그들은 미션 스트리트와 24번가 모퉁이에 대형 벽화 “라티노아메리카”를 그렸는데, 이 한 작품에 멕시코·칠레·볼리비아 등 여러 라틴 아메리카 문화의 상징들을 한데 모아 통합된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이는 다양한 출신 배경의 라틴계 주민들이 모여 사는 미션 지구의 현실을 예술적으로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벽화의 색감과 주제는 주변 주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이내 인근 곳곳에 더 많은 벽화가 등장하도록 영감을 주었습니다.

특히 발미 앨리(Balmy Alley)는 미션 지구 벽화 운동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1972년 처음 몇 점의 벽화가 그려진 이후, 1984년에는 예술가 레이 팟틀런(Ray Patlán)의 제안으로 30여 명의 벽화가들이 이 한 블록 골목의 집집마다 벽화 프로젝트를 벌였습니다. 골목에 면한 각 차고 문과 담장마다 하나의 벽화를 그려넣고, 전체를 관통하는 이중 주제를 정했는데, 하나는 중미 원주민 문화의 찬미였고 다른 하나는 미국의 중미 군사개입에 대한 항의였습니다. 이는 당대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등 중앙아메리카에서 벌어진 분쟁과 미국의 개입에 분노한 지역 주민들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27점의 벽화들은 1985년 9월 성대한 헌정식과 함께 공개되었고, 샌프란시스코 역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공동체 벽화 프로젝트로 기록되었습니다.

발미 앨리를 거닐면, 벽마다 그려진 형형색색의 그림들이 마치 도시의 심장 소리를 들려주는 듯합니다. 어떤 벽화에는 마야 피라미드와 전사의 이미지가, 또 다른 벽화에는 농부와 노동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과거와 현재의 투쟁과 희망을 상징합니다. 가령 한 작품에서는 니카라과 혁명의 문해 캠페인 장면이 그려져 있고, 다른 작품에서는 멕시코 농장 노동자들의 파업 구호가 등장합니다. 또한 여성 예술가들이 그린 벽화에는 여성의 힘과 공동체 연대가 생생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벽화들은 미션 지구 주민들의 집단 기억과 정체성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1970년대 이후 현재까지도 발미 앨리와 미션 지구 곳곳에서는 세대와 주제가 바뀌어가며 새로운 벽화가 그려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21세기 들어 닥친 젠트리피케이션의 파고 속에서도, 벽화들은 지역 공동체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우리는 여기에 있다”는 선언을 시각화하고 있습니다.


벽화를 통해 거리의 역사를 써내려간 미션 지구의 노력은, 빠르게 변모하는 도시에서 문화적 레이어를 지켜내려는 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20세기 말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또 다른 거대한 물결이 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산업혁명 이후 최대의 패러다임 전환이라 불릴 디지털 혁명, 즉 첨단 기술 산업의 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물결은 도시의 경제와 공간을 완전히 뒤바꾸며, 전혀 다른 차원의 Layer를 더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차고에서 시작된 혁신: 테크 신화와 현대 도시

샌프란시스코 베이에는 20세기 중후반 무렵부터 서서히 첨단 산업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었습니다. 1939년 팔로 알토의 한 작은 차고에서 휴렛과 패커드가 전자기기를 만들던 HP 차고의 전설로부터, 1970년대 스티브 잡스와 워즈니악이 로스앨토스 집 차고에서 첫 애플 컴퓨터를 조립한 이야기까지 “차고 창업” 신화는 이 지역 기술 혁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화는 말 그대로 작은 개인 차고에서 세계적 기업이 태어난다는, 미국적 기업가 정신의 상징으로 자리잡았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 마이크로칩과 개인용 컴퓨터 시대가 도래하면서, 실리콘밸리로 불린 샌타클래라 계곡 남부에서 시작된 기술 붐은 샌프란시스코 시내까지 확장되었습니다.


1990년대 닷컴 붐 시절, 특히 소마 지역의 넓은 창고와 로프트들은 신생 인터넷 회사들의 보금자리로 탈바꿈했습니다. 한때 버려졌던 산업 창고는 스타트업들의 개조 사무실이 되었고, 거리에는 젊은 프로그래머들과 창업자들이 활보하기 시작했습니다. Twitter나 Uber 같은 기업들은 2000년대 후반 샌프란시스코 도심에 본사를 두었고, 그 주변으로 현대적인 공유 오피스와 고급 아파트가 솟아났습니다. 예전의 선박 공장과 기계 창고 자리에 이제는 클라우드 컴퓨팅 센터와 바이오텍 실험실이 자리하고, 낡은 벽돌 건물 벽에는 기업 로고가 새겨졌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도시 풍경의 최상층에 완전히 새로운 미학을 덧입혔습니다. 예를 들어, 과거 철도 터미널 부지에는 2018년 샌프란시스코의 새로운 최고층 빌딩인 세일즈포스 타워가 우뚝 솟아올라, 도시 스카이라인을 다시 그렸습니다. 고층 빌딩들의 유리 커튼월 파사드에 비치는 구름은, 마치 미래 도시의 일면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러나 테크 붐이 가져온 번영의 이면에는 기존 지역사회와의 마찰, 급격한 물가 상승, 불평등 확대 등 도전도 함께 존재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앞서 살펴본 미션 지구의 벽화들과 공동체 운동은 더욱 큰 의미를 띠게 됩니다. 실리콘밸리의 부호들이 럭셔리 버스를 타고 도시와 교외를 오가며 새로운 신화를 써내려갈 때, 미션 지구의 주민들은 “여기 사람이 산다”는 메시지를 벽에 그려 넣으며 지역을 지키려 애썼습니다. 샌프란시스코는 이렇게 혁신과 저항, 성장과 포용의 이야기를 동시에 써가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21세기의 샌프란시스코는 마치 한 거대한 건축물처럼 여러 시대의 층이 노출된 채로 존재합니다. 길을 걷다 보면, 골목담 하나에도 금광시대의 흔적이 있고, 그 위에 빅토리아 풍 금장 장식이 얹혔다가, 다시 현대의 스트리트 아트가 덧칠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풍스러운 주택 옆에 최첨단 스타트업 캠퍼스가 자리잡고, 오래된 선교회 종탑 너머로 유리 마천루가 반짝입니다. 이러한 장면들은 겹겹의 시간이 남긴 흔적들이며, 건축가의 눈에 비친 샌프란시스코의 진정한 아름다움이기도 합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며 빚어내는 서사 속에서, 이 도시는 계속해서 새로운 층을 쌓아올리고 있습니다. 그 층위들은 서로를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이테처럼 도시의 정체성을 풍부하게 형성하며, 샌프란시스코라는 장소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시간은 언제나 새로운 층을 쌓아 왔습니다. 골드러시, 지진 재건, 산업화, 커뮤니티 운동, 테크 붐까지 도시는 그때마다 스스로의 모습을 바꿔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곳은 또 한 번 변화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과거의 도시는 벽돌과 목재로 확장되었다면, 지금은 자율주행차가 도심의 흐름을 재편하고, AI가 건물 운영을 관리하며, 네트워크가 보이지 않는 기반시설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AI가 만들어가는 도시’라는 주제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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