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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여행의 소득.

항공사 마일리지와 유튜브 알고리즘.

by 현진

그게 대략 1년 반 전. 그 무렵 나는, 다른 무언가에 온통 마음을 뺏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그 한 가지를 기다렸다는 듯이 거기에만 집중했다. 바로 ‘항공사 마일리지’. 첫 해외여행을 시작으로 쌓아온 마일리지 중 일부가, 그러나 결코 나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의 크기가 코로나19 시절 몇 번의 자동 기한 연장을 끝으로 사용 마감 임박을 강하게 재촉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가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가야 한다는 마음이 컸다. 공짜인 듯 공짜가 아닌, 따지고 보면 확실히 공짜가 아닌 게 분명한 그것. 지금까지 내가 쓴 돈으로 모은 마일리지로 구입하는 항공권이니까, (산 적은 없지만) 내 비행기 티켓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필코 구해내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런 내 생각을 모두 다 읽은 것처럼 알고리즘이라는 게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고, 신기하다가도 무섭다. 유튜브는 ‘가야 한다’는 마음에 ‘가고 싶다’까지 더하는 영상들을 나에게 추천하기 시작했다. 나는 거부하지 않고 모조리 받아들였다. 가능한 더 많이, 더 깊이.


시간을 거슬러보니 마지막 해외여행이 2017년이었다. 7년 만의 여행. 그것도 처음으로 혼자 떠나야 하는 여행. 지금까지 프리랜서라서 마음만 먹으면 시간 부자로 살았어도 여행을 가지 못했던 이유는 누구나 짐작하듯이 돈 때문이라는 걸 절대 부정할 수는 없다. 맞다. 하지만 실상 그것보다 나를 가로막은 더 큰 사정은 같이 갈 사람이 없다는 거였다. 나는 ‘혼자 무엇을 하는 걸’ 극도로 두려워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어떻게 혼자 살고 있는가 하는 아이러니...) 그런 내가 ‘혼여’라고?! 맙소사. 마일리지를 포기해야 하나, 몇 번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10여 개의 도시. 나름 적지 않은 여행 경험이 있었어도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대부분 나의 결심보다는 ‘누군가의 덕분’에 이뤄졌다. 단지 혼자가 아니라서 얻은 것도 아니었다. 서툰 나를 위해 누군가가 채워주었기에 가질 수 있는 추억이었다. 그랬던 나였는데, 그 누구도 없이 나 혼자 하는 여행이 가능할 수 있을까. 아니, 다시 한국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기는 한 걸까.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걷히는 데는 일주일 정도가 걸렸다. 유튜브 알고리즘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제안하는 모든(!) 영상을 보다시피 하니 예상 못한 자신감이 불쑥 튀어나와 존재감을 나타냈다. ‘엇?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겠는데?’ 결국 마일리지 티켓을 끊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3박 4일이지만 시간을 이리 빼고 저리 빼고 나면 2박 3일 일정의 티켓. 목적지는 대만 타이베이.


공항에서 호텔까지 도착하는 것은 ‘아니 이렇게 쉽나’ 싶을 만큼 일사천리였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유튜브로 그 장면을 거짓말 조금 보태면 50번은 봤고, 머릿속으로 100번가량 시뮬레이션도 마친 후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후로는 내 뜻대로 된 것보다는 내가 기대한 대로 되지 않았다. 누가 그랬던가. 그게 여행의 맛이라고. 그 맛은 순간순간 매웠고, 때때로 서글펐으며, 가끔은 외로웠고, 어쩔 땐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잠시 후 그 모든 게 가시고 나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면서도 실은 너무 재미있어서 웃음을 참을 수 없는 달콤 쌉싸름한 맛이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고작 2박 3일뿐일 텐데, 많은 일이 있었다. 오해하지 말기를. 많은 것을 했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여러 가지 크고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는 말이다. 일정은 정말 한가하기 그지없었다. 타이베이하면 다들 하는 걸 나는 거의 안 하기도 했고, 못하기도 했다면 조금 설명이 될까. 용산사, 단수이, 중정기념당, 스펀. 이 네 곳이 내가 간 곳의 거의 전부였다. 하하하. 누군가는 가성비가 떨어지는 여행, 랜드마크를 가지 않은 실패한 여행, 무색무취의 재미없는 여행, 왜 갔는지 모르겠는 의미 없는 여행, 맛집을 안 간 맛없는 여행 등등의 한 줄 평을 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 모두를 인정한다는 말은 아니다. 딱 하나만 빼고. 가성비가 떨어지는 여행이긴 했다. 완전히.


여행에서 한 게 너무 없다시피 했고, 함께라면 세이브되었을 경비도 오롯이 혼자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가성비 면에서는 완패 그 자체였다. 냉정하게 따져서 3만 마일리지를 지키기 위해 내가 실제로 쓴 돈은... 얼마더라.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뿐이라며 핸드폰을 최신 기종으로 바꾸고, 낡은 캐리어 대신 신형 캐리어를 사고, 다른 여행에서는 친구들과 도미토리에서 묵기도 했으면서도 무조건 안전한 도심 호텔을 고집했으며, 여행지에서 입을 옷을 다 새로 구입하는가 하면, 오랜만이니까 면세품도 거하게 담고. 하... 거기까지만 말하겠다. 하지만 이것도 여행의 맛이자, 일부이자, 때로 전부일 수도 있겠지. 또 그러면 좀 어떤가. 아니, 그래도 괜찮은 것 같다.


나는 이 여행에서 혼자라도 할 수 있다는 나의 가능성을 겪었다. (비록 엉망진창 좌충우돌투성이일지라도.) 깨달은 것도, 배운 것도 아닌 겪었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단 한 번도 깨우치지 못한 나에 대한 편견. 그것의 일부를 아주 조금이라도 깬 것이 이 여행이 가져다준 가장 큰 소득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얼마 전 크리스틴 로젠이 쓴 <경험의 멸종>이라는 책을 읽고 난 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한 여행은 정말 나의 여행일까, 아니면 유튜브에 올라온 누군가의 여행 영상을 경험한 여행일까.


스위스 예술가 코린 비오네는 이탈리아 피사를 여행하면서 관광객들이 피사의 사탑을 몇 가지 같은 각도에서 촬영하는 것을 봤다. 이후 사진 공유 사이트를 뒤져보고 이런 의도하지 않은 시각적 동조가 관광지에서는 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영국 사진 저널>에 "우리가 알고 있는 사진을 다시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습니다. 우리는 사진을 재생산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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