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혼여 #4 DAY 1_pm 02:14
나의 오랜 지병 거대불안증식 병은 ‘안 될 거야’, ‘안 되면 어떡하지?’가 마음의 기초 설정값. 평생을 함께한 셀프 부정적 마음가짐은 여행에서 돌아온 후, 치유될 조짐을 조금씩 보였다. 대만에서 여러 ‘큰일 났다’의 상황을 맞닥뜨렸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큰일이 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였다.
그래서 지금 내 손에 MRT 토큰이 있다.
대만의 대표적 교통카드인 이지카드는 버스, 지하철, 기차, 택시 이용은 물론 편의점 등에서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다. 나는 불과 몇 분 전 럭키 드로우로 5천 대만 달러가 든 이지카드에 당첨이 됐다. 그뿐인가. 카드 앞이나 뒤에 와이파이 모양이 있으면 우리나라 신용카드도 교통카드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왜 MRT 토큰까지 손에 들고 있는 거지?
수없는 ‘만약에’를 가정했다. 더군다나 혼자, 그것도 처음으로 도전하는 해외여행. ‘다 잘 될 거야’라는 마음보다는 ‘다 안 될 수도 있어’가 기본 전제인 것은 이상할 것이 전혀 없었다. 다만 그런 전제를 하고서도 한국에서 환전을 하지 않고 전부 현지 환전을 선택한 것은 다소 의외 아니, 완전한 모험수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냥 해보고 싶었다. 이제 환전을 미리 하지 않고 앱에 돈을 충전해 놓으면 수수료 없이 언제 어느 때고 현지 환전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했고, 궁금했다. 그 경험을 나도 갖고 싶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또 해외여행을 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이번이 기회였다. 대신 혹시 모를 ‘안 될 수도 있어’를 대비하기 위해 우리나라 돈 5만 원을 가져가 대만 은행에서 환전을 하기로 했다.
‘경우의 수 여행’ 의식의 흐름은 이랬다. 이지카드 당첨이 안 될 수도 있어. 솔직히 이건 너무 당연한 전제. 처음 발급받은 트래블 카드가 안 될 수도 있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내가 ATM기를 제대로 못 다룰 가능성이 충분히 높음. 5만 원권 환전은 공항에서 할 수 없으니 일단 시내로 가야 함. 우리나라 신용카드가 교통카드로 쓸 수 있다고는 하지만 갑자기 나도 모르는 사이 카드가 손상됐거나 개찰구가 먹통이라면 나는 공항에서 벗어날 수 없을 지도? 전혀 없는 상황은 아니니까 미리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음. 그럼 모든 것이 다 안 될 수도 있다는 가장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서 MRT 토큰을 사두자. 게다가 한국에서 사전에 예약하면 심지어 더 싸다잖아. 이득이야. 이득.
예약해 둔 토큰을 찾아 개찰구를 통과하고 MRT를 기다리는 동안 생각했다. 이게 과연 돈을 아끼는 여행이 맞나 싶으면서도, 이래서는 앞으로도 절대 가성비 있게 여행을 다닐 수는 없겠다 싶으면서도. 어쨌든 무사히, 순조롭게, 계획대로 아니 ‘만약에’대로 MRT를 기다리고 있는 나 자신이 마냥 대견했다. 이제 5분 후면 MRT를 탈 수 있다.
‘오, 지금까지 너무 좋아’
신나서 셀카 몇 장을 찍고 정신을 차려보니 ‘설마’하는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분명히 내가 처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출입문과 나 사이를 살짝 띄어 놓고 기다린 게 문제였을까. MRT 도착 1분 전 어떤 아주머니가 내 옆, 그러나 나보다 살짝 앞에 자신의 캐리어를 두는 것이다.
‘내가 예민한 거겠지’라는 생각과 ‘설사 그렇다고 해도 살짝 늦게 타면 뭐 어때?’라는 생각의 교차 속에 MRT가 도착했다. 그런데 웬걸! 쏜살같이 나를 가로막고 1등으로 탄 그 아줌마만 앉고 나는 40분간 서서 가야 했다. 예상치 않은 불쾌한 상황은 나를 ‘화’의 길목으로 안내하고 있었지만 나는 단박에 거부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공항에서 대만 시내로 이르는 풍경이 그렇게 만들었다. ‘푸르름’ ‘상쾌함’ ‘선명함’ ‘깨끗함’을 마주하고 있자니 마치 내가 도화지처럼 새하얗게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청춘.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이라는 뜻으로,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 또는 그런 시절을 이르는 말. 내가 왜 대만을 생각하면 ‘청춘 영화’를 떠올리는지 그 풍경을 바라보며 그 이유를 완전하게 실감했다. 정말 착각에 불과한 기분이지만 왠지 나는 착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이 정말 그랬다.
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은 잘 모른다. 잘 몰랐으면서도 나는 착한 사람이 되려고 무던히 애쓰며 살아왔다. 냉정하게 말해서 ‘착한 사람이 되려’고 애를 썼던 것은 아니었다. ‘착한 사람이라는 타인의 평가’를 받으려 애썼다. 나의 근본이나 실제와는 상관없이 그런 평가를 받은 적도 있고, 실패한 적도 있다. 일일이 통계를 내본 적은 없지만 ‘셀프 부정적 마음가짐’의 소유자로서 긍정보다 부정 평가를 훨씬 더 많이 기억하는 편이므로 나 스스로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던 것 같다. 정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착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말은 없는 사실처럼 취급했다.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더 집착했다. 착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너는 착하지 않으니까 더 많이 노력해야 해,라는 채찍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가혹한 채찍을 받으며 나는 스스로 작아지는 길을 택하고 또 택했다. 그때는 그게 억울하지도 않았다. 당연했다. 나는, 착하지 않으니까.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으니 알고 보니 나도 착한 사람이다, 뭐 이런 결론을 예상한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다시 해 봐도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나를 너무 좋아하는 나르시시스트이기도 하고,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라서 착하다는 타이틀을 갖기에는 애초에 글렀다.
나는 착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다만 그로 인해 잘못이나 실수를 하게 되거나 타인에게 상처를 주게 될 경우 진심으로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작아지게만 하는 채찍질을 하지 않는다.
타이베이 시내로 향하던 기차 안에서 착해지는 것 같은 그 느낌이 좋았던 건, 가질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것을 순간 가지게 되었다는 착각. 그 착각 속에서 보낸 3박 4일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