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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대에게서 집은 무엇일까

나의 서른 결혼 이야기_시어머니와의 첫 만남, 그 거래의 추억

by Joy Kim

4.

아가씨, 수첩 한번 펴볼래? 우리 아들한테 들어온 선 자리가 얼마나 대단한 지, 알려주려 그래. 1번, 변호사, 30억 건물 한 채, 2번, 한의사, 부모님 100억 자산가 3번, 서울대 나온 회계사, 아버지 의대 교수...아니, 왜 수첩은 안 꺼내? 7번 까지 있어, 어서 꺼내서 써야지! 열쇠 세 개는 기본이고 모두. 나는 그 앞에서, 때아니게 헤벌쭉 웃고 있었다. 어르신, 제가 보기보다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이에요. 머릿속에 7번까지 잘 써놓고, 오래오래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아니, 어른이 말하는데, 수첩 꺼내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네, 그러네요 어르신, 쓰겠습니다. 나는 가방에서 얼른 수첩을 꺼내, 1번, 2번 숫자를 쓰며, 얼굴을 들어 그 말씀을 하시는 어르신의 얼굴을 살폈다. 어르신은 참으로 고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학창시절 교복 모델도 하셨고, 미스 능금 아가씨 이력도 가지고 계셨다. 그래, 참으로 고왔는데, 그 말씀을 하시는 이 상황이 참으로 말할 수 없이 여러 감정으로 나에게 온 것이었다.


내 안에는 언제나, 나를 열 한 살 까지 기르신, 33년생 내 외할머니가 살고 계시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불쑥 나 대신 대사를 해주시곤 한다. 네 어르신, 이제 저에 대해 소개하자면, 저는 가을에 태어난 돼지입니다. 추수가 끝난 후에 태어난 돼지라, 가는 데마다 좋은 먹거리가 풍성하고, 잔치가 열린듯이 사람들이 늘 주변에 가득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런 가을 돼지 둘이 만나 사니, 얼마나 잘 살겠어요. 나는 이렇게 나도 모를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아니, 순하디 순한 자식이 말이야, 처음으로 씩씩거리더라고, 그래 이 결혼은 해야하는 거구나 했지. 뒤에 아버님은 이 결혼을 그렇게 동의해 주셨고.


지금 생각하니, 어머님의 그날의 말씀이 되려 나로 하여금, 이 결혼을 결정하게 한 것 같다. 어머님 본인도, 자신을 속절없이 다 보여버린 눈앞의 아가씨에게, 승낙할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 받아들인 시간이었을까. 우리는 우리가 나눈 표면 언어와는 무관하게, 레스토랑에서 나와 팥빙수를 먹고 그날 웃으며 헤어졌다.


그래서 나는 순번 8, 가을날 돼지로 그렇게 어머님의 며느리가 되었다. 그날의 기억은 오랫동안 내 기억 깊숙한 서랍에 들어가 있다가, 살면서 한 번씩 꺼내 보게 된다. 꽤나 쓸쓸했던 오후. 그날 언덕 위에 자리한 그 고풍스러운 레스토랑의 조명과 어머님의 미세하게 떨리던 팔과 찻잔에 닿은 어머님의 손, 조금은 빛이 바랜 반지가 내내 잊히지 않았다. 새로운 가족을 맞이 한다면, 나를 더욱 환대하는 누군가이길 나 역시 바랐을 터이다. 각자에게 삶이 나아지는 선택이길, 어머님 역시 바랐을 것이고. 그런데 두 여자는 그날 그렇게 가족이 되기로 했다. 나는 내 힘으로, 열쇠 세 개 중 하나라도 이 여성에게 건네줄 수 있기를 바랐는지도. 어머님도 덥썩 나로부터 무언의 약속을 받아들이신 것 같은, 그런 날이었다.



5.

“연서야, 조이 똥쌌다!” 외삼촌이 기말고사 공부중인 막내이모의 손이 필요해서 군립 도서관 열람실 문을 열자마자, 큰소리로 외친말이다. 막내이모는 얼굴이 벌개져서, 잠자다 걸린 불침번처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돌쟁이인 내 똥기저귀를 갈러 집으로 냅다 뛰었다. 외할머니께서 내가 잠들자 장에 가셨고 그 사이, 수습 불가능한 상황이 된 것이다. “동네 떠나가게 운다! 더 뛰어라!” 벌써 사십 해나 지난 일이지만, 그 시절 이야기는 만날 때마다 우리에게 배꼽을 잡게하는 큰 즐거움이다. 그렇다. 나에게는 생각만해도 웃음이 나는 가족들이 있다.


30년대생 나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네 명의 이모와 외삼촌과 외숙모 그들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나는 자라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두 아이를 길러 보니, 내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과분한 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누구도 나에게 그것을 되갚으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나를 길러준 그들에게 삶으로 보답해야 하는 어떤 의무감이 있었다. 알만한 대학에 가고, 늦지 않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할머니가 자랑할 만한 그런 남편을 만나고. 외할머니 밑으로, 열 한 명의 손주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아왔으므로. 그 사랑의 보답으로라도 더 잘 살아내야 한다는 부채감. 그 사랑은, 살면서 머뭇거릴 때마다 나의 등을 세차게 떠밀어 주었고, 모자란 능력에도 어떤 언덕을 뛰어넘어 볼 마음을 건네주었다.


나는 지금도 시어머니를 보면, 나를 보는 느낌이 있다. 받은 사랑이 많은 언덕으로 살아왔지만, 그것을 내 식대로 전달할 상황이, 환경이, 결혼 이후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으셨음을. 당시에 고연봉 전문직이었던 아버님에게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 화려한 시절만을 생각했을 터인데, 아픈 남편 곁에서, 삼남매를 거의 혼자 키워내신 고단함에 대해 나는, 이따금 갈 길 없는 마음이 불길에 휩싸였다가도 다시 겸허해 질 뿐이다.


그래서 어느 때는, 다시 예의 그 레스토랑으로 돌아가, 우리의 선택을 번복하고 싶어지기도 하지만. 그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느닷없이 어머님은 내 편을 잘 든다. “나는 다른 누구보다 네가 내 며느리인 게 참 좋고, 고맙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아직 어머님께 정산을 덜 끝낸 며느리 같은 마음이 든다. 나만 손해 본 것 같은 마음에 울컥해 달려온 젊음의 호기, 질주 그리고 비뚤어짐 뿐만 아니라, 내가 이 세계로부터 거저 받은 것, 빚지거나, 큰 노력 없이 주어진 것들이 많음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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