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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Apr 26. 2022

손석구, 현실에 닿을 듯 닿지 않는

ize 소속 당시 내보냈던 기사를 아카이빙 차원에서 모아둡니다




 2019년 8월 7일


tvN ‘60일, 지정생존자’(이하 ‘지정생존자’)에서 청와대 비서실장 차영진을 연기하는 손석구는 늘 지쳐있다. 옆에서 남들이 뭐라고 떠들든 시종일관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는 무심함이나 앞쪽으로 둥글게 굽은 어깨에 두 팔과 고개를 축 늘어트리고 걷는 모양새는 과로 사회를 살고 있는 여느 평범한 직장인을 데려다 놓은 것처럼 친숙하다.



손석구의 연기는 자칫 뜬구름처럼 느껴질 수 있는 차영진을 현실에 발 딛게 한다. 사실 차영진은 ‘지정생존자’ 세계 인물 중에서 가장 비현실적이다. 노론 이후 첫 정권교체를 이뤘다는 양진만(김갑수) 정부의 일등 공신이며,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청와대 비서실을 이끌 정도로 유능하다. 선임 행정관 신분으로 정무수석을 향해 "대통령 팔아서 자리 구걸하지 말라"라고 일침을 가할 정도로 꼿꼿한 기세를 가졌으며, 제1야당 대표 윤찬경(배종옥), 여당 유력 대권 주자 강상구(안내상)의 달콤한 영입 제안에도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여야를 막론한 정적들, 언론, 여론을 간파하고 전략을 세우는 그는 정치판 위 말들을 뜻대로 움직이지만, 결코 스스로 판 위에 올라서지 않는다. 박무진(지진희)이 정직하고 도덕적이며 권력에 잠식되지 않는 이상적인 대통령이라면, 차영진은 그런 대통령을 지켜달라고 부탁할 만큼 든든한 ‘정치적 경호실장’이다.



감정을 실으면서도 모든 대사를 또렷하게 발성해 정확히 전달하는 배우들 사이에서, 손석구는 많은 단어를 흘려 뱉고 어조를 예상 범위 밖으로 급격하게 변화시킨다. 전자가 구사하는 것이 이른바 ‘연기 톤’이라면 후자는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 말하는 실생활의 행동 양식에 가깝다. 갑자기 곤란한 일이 닥쳤을 땐 얼굴을 한껏 찌그러트리고, 조급한 상황에서는 음 이탈을 내기도 한다. 그는 카메라 동선이나 편집 따윈 상관없다는 듯 빠르고 과감한 몸짓을 사용함으로써 설정상 멀게 느끼기 쉬운 인물을 현실 가까이 붙잡아 놓는다. 설사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이렇게 손석구가 획득한 핍진성은 보는 이가 차영진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정직은 반드시 공격당할 약점에 불과하다고, 좋은 사람에겐 대통령 자리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믿는 그는 지난 수년간, 혹은 언제나, ‘아름다운 사람’들이 패배하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던 모두가 가진 회의와 비관의 반영이다.



“저는 대행님 대답을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요?” 박무진에게 대선 출마를 제안한 후 대답을 보챌 때, 그는 사적으로 호감을 느낀 정수정(최윤영)과 '치맥' 약속을 잡을 때보다도 한껏 상기된 모습이다. 체념한듯 했던 그가 실은 누구보다도 간절히 아름다운 사람을 바라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좋은 사람이 이기는 세상’을 보고 싶어졌다고 말하는 차영진이 미간 주름을 펴고 활짝 웃는 순간을 기대하게 되는 건 그래서다. 가깝고도 먼, ‘현실의 누군가’처럼 보이는 그는 자꾸만 허구와 같은 일이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한다. ‘지정생존자’ 세계가 실제의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 미묘한 배우 손석구가 부리는 신묘한 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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