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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경 Nov 20. 2021

모리타 마사야스를 찾아서

森田正安を探して

* 이 글은 교토대학 일본사연구실의 동문회에 해당하는 독사회(讀史會)에서 발행하는 『국사연구실통신』 제63호(2021년 가을호)에 실린 글 「모리타 마사야스를 찾아서」를 한국어로 옮긴 것입니다.

(金玄耿「森田正安を探して」『国史研究室通信』63、2021年10月)


2019년 3월, 연구지도 인정을 받아 교토대학(京都大學)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같은해 4월부터 도쿄국립박물관(東京國立博物館)에서 일하게 되어, 우에노(上野) 역에서 지하철로 두 정거장 떨어진 미노와(三ノ輪)로 이사했다. 조금씩 일에 익숙해질 때쯤에 드디어 미노와 주변의 역사 관련 장소에도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닛코 가도(日光街道) 길가에 있는 엔쓰지(圓通寺)라는 절을 방문한 것은 10월 27일의 일이었다.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가 건립하고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가 재건했다고 하는 절의 유래가 경내에 있는 석조 7층탑에 명문으로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석탑 주위에 울타리가 둘러져 있어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절에 있던 승려 한 분이 엔쓰지 홈페이지에 석탑의 명문이 실려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지만, 그 명문은 원문 그대로를 옮긴 것이 아니라 토를 달아 읽은 것이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원문이 확인 가능한 자료를 찾아보려고 하였다. 그랬더니 등잔 밑이 어둡다고 내가 근무하는 도쿄국립박물관에 <중흥 엔쓰지 기 및 탑명 탁본(重興圓通寺記幷塔銘拓本)>(관리번호 P-911)이 소장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탁본 사진을 열람하여 명문을 판독해 나가면서, 이 탁본을 누가 제작했는지 신경이 쓰였다. 도쿄국립박물관의 박물관 역사 자료에 따르면 탁본은 1912년 3월에 모리타 마사야스(森田正安)가 기증했다. 마사야스는 1911년부터 1917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도쿄제실박물관(東京帝室博物館, 지금의 도쿄국립박물관)에 55건의 탁본을 기증했다. 게다가 마사야스는 도쿄제실박물관 역사부(나중에 역사과로 바뀜)의 고원(雇員)으로 근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고고학자 시바타 조에(柴田常惠)는


박물관 역사과에 모리타 마사야스 씨라는 사람이 있어 탁본을 잘 만들었는데, 비석 종류로 문자를 주로 탁본했다


고 회고하고 있어, 마사야스가 기증한 탁본은 마사야스 본인이 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사야스는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그는 도치기현립(栃木縣立) 호샤쿠지(寶積寺) 심상소학교의 훈도(訓導)를 거쳐, 1896년 11월에는 오키나와현(沖繩縣) 슈리(首里) 심상고등소학교의 훈도 겸 교장에 취임했다. 또한 오키나와현 교육회의 평의원과 지출이사(支出理事) 등을 맡았다. 그런데 1900년 5월, 마사야스는 교장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도치기로 돌아갔다. 1902년 7월에 도쿄제실박물관의 고원이 된 마사야스는 역사부의 사무와 전적(典籍), 문서, 금석문, 무기 등의 소장품 관리를 관장하였다. 당시 동료였던 와다 센키치(和田千吉)나 후루야 기요시(古谷淸) 같은 고고학 연구자들과의 교류 속에서 제국고적취조회(帝國古蹟取調會), 일본고고학회, 풍속연구회 등에도 참가하여 조사와 집필활동을 하였다. 마사야스는 1917년 8월에 병을 이유로 고원직에서 물러났다.


조사를 통하여 마사야스의 인물상은 대체로 파악 가능했지만, 결코 조사가 충분하지는 않았다. 특히 마사야스의 가계나 활동 배경 등에 대해서는 모르는 점이 많았다. 풍속연구회의 잡지 『풍속지림(風俗志林)』에 실린 마사야스의 구술(口述)에서는 본인을 '옛 시모쓰케국(下野國) 기쓰레가와(喜連川) 번사(藩士)'라고 칭했는데, 이는 그의 출신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기쓰레가와번(喜連川藩)에는 모리타(森田) 성을 가진 번사 가문이 여럿 존재하여, 그 중 어느 가문에 속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2020년 1월, 도쿄국립박물관을 방문한 지바시립향토박물관(千葉市立鄕土博物館)의 도야마 신지(外山信司) 씨를 만나서 모리타 마사야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혹시 마사야스가 기쓰레가와 번사라고 한다면 번과 연관이 있는 장소에 묘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고, 묘비석에 사망한 해 등의 정보가 적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래서 나는 마사야스가 도쿄에 체재할 때의 집터 주변에 있는 야나카(谷中) 묘원을 걸어보기도 했지만 묘를 찾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해 10월은 내가 박사학위청구논문을 제출한 다음달이었는데, 이 때 도치기현립문서관(栃木縣立文書館)에 가서 아키모토 다케오 가 문서(秋元武夫家文書)에 들어 있는 모리타 마사야스가 쓴 편지 2통과 관련 자료를 열람하고, 도치기현 사쿠라시(さくら市) 기쓰레가와에도 가서 현지 조사를 시행했다. 단, 스케줄에 여유가 없어서 기쓰레가와 번주 가문의 묘가 있는 절인 류코지(龍光寺)에는 가지 못했다.


같은해 12월 22일, 갑자기 도야마 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다른 용무 때문에 기쓰레가와를 방문해서 류코지를 찾아간 도야마 씨가 주지 스님인 후카오 소준(深尾宗淳) 씨에게 마사야스에 대하여 물어보니, 모리타 마사야스의 묘는 류코지 경내의 묘역에 있다고 알려주셨다고 한다. 게다가 주지 스님은 모리타 가문 사람과도 연락을 취해 주셨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내 마음은 엄청 두근거렸다. 금방이라도 조사를 하러 가고 싶었지만 해가 바뀌고 코로나19로 인한 긴급사태선언 때문에 일단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2021년 3월, 박사학위를 취득한 나는 귀국 준비를 시작하면서 기쓰레가와로 조사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웠다. 5월 31일, 드디어 기대하던 조사 여행을 갈 수 있게 되었다. 도야마 씨와 도야마 씨의 친구인 중세 고고학 연구자인 야나세 유이치(簗瀨裕一) 씨와 함께 류코지를 방문하여 주지 스님 후카오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마사야스의 묘소를 확인했다. 그리고 모리타 가문 댁으로 가서 모리타 도시에(森田利江) 씨를 만났다. 도시에 씨는 집안에 전해져 오는 계보도와 마사야스 자필 서화 등 마사야스에 관한 자료를 보여주셨다. 나중에는 제적등본도 떼어다 주셨다. 그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여 기쓰레가와에서 소학교 훈도로 활동하던 야마가타현(山形縣) 출신의 네모토 리사부로(根本利三郞)라는 인물이 모리타 다치(森田たち)라는 여성과 결혼하여 모리타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고, 나중에 모리타 마사야스로 개명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모리타 가문은 기쓰레가와번의 루스이(留守居) 직책을 맡았던 모리타 우타타(森田轉)의 자손이었다. 또한 마사야스는 가에이(嘉永) 2년(1849)에 태어나 1923년에 야마가타시에서 사망하였다.


안타깝게도 모리타 가문에는 현재 마사야스의 사진이나 초상화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문헌을 조사하던 중에 마사야스의 얼굴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를 만나게 되었다. 1906년 4월 29일에 일본 체신성에서 발행된 「육군 개선 관병식 기념: 중고(中古)의 개선식」이라는 그림엽서를 제작하는 데 관여한 히바타 셋코(樋畑雪湖)의 회고에 따르면, '왼쪽에 오리에보시(折烏帽子: 모자의 일종)를 쓰며 꼭대기에서 턱까지 끈을 묶고 도마루(胴丸: 갑옷의 일종)를 착용하며 술주전자를 든 사무라이(侍)는 탁본의 명인으로 서예를 잘 쓴 모리타 마사야스 씨가 분(扮)한 것'이었다. 가운데 주장(主將)의 모델인 고고학자 다카하시 겐지(高橋健自)가 갑주를 두르고 같은 포즈로 찍은 사진이 남아 있으므로, 왼쪽 사무라이 그림도 마사야스의 사진을 베껴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육군 개선 관병식 기념 중고(中古)의 개선식 그림엽서 (소장, 촬영: 김현경)


모리타 마사야스를 찾는 과정에서 한 자료를 발견하였는데, 그에 대한 논문을 모 잡지에 투고했지만 심사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나는 2021년 7월 31일에 도쿄국립박물관 어소시에이트 펠로우에서 물러나고, 8월 7일에는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박물관에서 일하는 동안에 약 110년 전의 박물관 '선배님'을 만나게 된 기적같은 일은 아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당분간은 일본과의 왕래가 어렵겠지만, 이 만남을 소중히 해서 앞으로도 마사야스의 발자취를 더듬어 나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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